상식의 배신

Essay 2017.05.30 17:32

때론 유식함이 무식함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군색한 변명’이라는 표현을 썼을 때 어떤 사람이 보고 “어? 군색이 아니라 궁색인데?” 라고 생각하여 내가 오타를 냈다든지, 아니면 나를 맞춤법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할 수 있다. 하지만 군색도 있고 궁색도 있는 표현이다. 그래서 내가 더 많은 표현을 알지만, 오히려 맞춤법을 모르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되어 버리는 억울한 경우가 생기게 된다. 적확하다, 제언하다 같은 표현들도 마찬가지다. 띄어쓰기, 그리고 영어 등 외국어로 가면 더 많은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유식과 무식이 단순히 ‘더 많이 안다’는 기준에서 구별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유식과 무식은 ‘잘못 안다’는 개념도 포함한다. 잘못 알면 무식하고 제대로 알면 유식하다. 군색과 궁색 문제에서, 군색을 알았던 쪽은 보통 잘 모르는 사실을 더 알았기 때문에 분명히 더 유식한 게 맞는데 군색을 몰랐던 쪽은 이것을 ‘잘못 알았다’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나아가 ‘제대로 안다, 잘못 안다’는 개념까지 오면 ‘제대로 아는 것이 무엇인가’는 모호해진다. 더 많은 지식을 아느냐는 그냥 모르는 것을 아는 데에 그치면 되지만, ‘제대로 안다’로 오면 이른바 Fact 논쟁이 시작되며 정말 Fact가 무엇인지는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다. 예로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누가했는가는 좋은 상식 문제다. 스피노자라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모범답안이고, 스피노자의 존재를 아는 것도 꽤 유식한 일이 된다. 그런데 이 말을 스피노자가 했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고 오히려 서양에서는 마르틴 루터의 발언으로 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은 아는가. 그러니까 이 발언을 ‘루터’가 했다고 대답하면 자칫 우리 사회에서는 무식해서 ‘아무나 찍은’ 사람이 되어버릴 수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럼 이 말을 진짜 루터가 했는가. 이 사실도 검증이 어렵다. 왜 스피노자로 알려졌는가. 일본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보통 노력으로는 제대로 된 추적이 어렵다. 상당히 깊은 연구과 조사 단계가 들어가야 확인할 수 있는 것이고, 지금까지도 내용이 쉽게 나오지 않는 걸 보니 결론은 ‘누가 했는지 모르겠다’에 가까운 듯 하다. 이렇듯 간단해 보이는 상식문제도 fact check가 대단히 어려워 질 수 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또래보다 상식이 풍부하다는 말을 들었고,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도 어렸을 때 무식한 아이들을 많이 무시했다. 많이 놀렸고, 더 유식해지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어렸을 때야 많은 지식을 취득하기만 하면 되니 쉬웠다. 그런데 살아보니 대충 취득했던 지식이 잘못된 경우가 생각보다 너무 많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대로 안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고, 이제 지식으로 상대를 무시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내가 당장 뭘 더 알거나 뭘 더 제대로 안 것 같지만 이에 배신당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나는 그 사람에게 대단히 잘못했을 뿐만 아니라 내 스스로도 대단히 부끄럽게 되는 참사가 발생한다. 부끄럽게 느끼면 다행인데, 우기기라도 하는 날에는 유식한 척하면서 사실을 호도하는 나쁜 사람이 되기 딱 좋다.


상식이라는 말은 통상의 지식, common sense다. 이 말 어디에도 이 지식이 옳은 것인지 제대로 된 것인지에 대한 내용은 없다. 영어 표현에는 심지어 knowledge보다 애매한 sense라는 말을 쓰고 있다. 상식은 그냥 꽤 절대다수가 그렇게 알고 있으면 상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과나무 발언은 스피노자의 발언이다’는 우리 사회에서는 상식이 분명히 맞다. 다만 인류 사회 단위에서는 상식이 아닌 게 또 맞다. 상식은 이처럼 지식의 본질적 측면과는 관계없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상식이 풍부하다는 말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반면에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는 말은 괜찮아 보인다.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이 합의하고 있는 ‘sense’에 부합하는 사회라는 건 일단은 상식이 무너진 사회보다는 나은 게 당연하다. 상식을 일부러 무너뜨려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지 않다면 말이다.


물론 유식함은 미덕이고 꼭 필요한 소양이다. 많은 것을 알아야 뭐가 진짜인지도 잘 안다. 많은 것을 알아야 더 중요한 사실과 덜 중요한 사실도 가려낼 수 있다. 많은 것을 알아야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그저 많은 사실을 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항상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이미 정보의 홍수에 살고 있는데 생각이 더 풍요로워지지는 못했다. 이 수많은 정보들의 대부분은 우리에게 더 많은 즐길 거리를 주는 데에 그치거나 그다지 깊은 의미를 주지 않는 가벼운 정보를 주는 데에 그쳤고, 때로는 가짜 뉴스와 같이 잘못된 정보를 지나치게 많이 주기도 하였다. 우리는 ‘아는 정보가 많다’는 점에서 예전보다 많이 유식해졌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정보가 ‘얼마나 제대로인지’ 정보를 선별하고, 정보를 음미하는 능력은 많이 퇴색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미덕이 되는 유식함은 지식과 정보를 알았다는 데에서 결코 그치지 않는다. 정보와 지식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를 생각해 보자. 좋은 정보를 가려 얻고, 소화하여 적절히 활용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 정보 선택, 정보 소화, 그리고 정보 조합. 이 것들을 더 많이 하기 위해 우리는 유식해지고자 한다. 그러니, 그저 더 많이 알았다고 뽐낼 필요가 없다. 적절한 정보 선별이 많은 정보의 취득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며, 정보 소화가 정보 선별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정보를 조합하여 새로운 활용을 만드는 일이 정보 소화보다 더 중요하다. 이 마지막 단계는 창의성을 의미하며, 이것 때문에 우리는 정보를 취득한다. 이 순환을 빨리 돌릴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은 창의적 활동을 할 수 있다. 이렇듯 상식이 풍부하고 아는 것이 많아도 그것만으로는 결코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없다. 적은 정보라도 제대로 선별하고, 소화하여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세상을 한 발짝 나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이 글에 혹시 띄어쓰기가 잘못된 점이 있거나 맞춤법이 틀렸거나 비문이 있거나 틀린 사실이 있더라도 아량으로 넘어가주고 내용을 함께 생각해 주길 바란다.


2017. 4. 7.


Posted by 호오님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가짜뉴스와 온라인 여론몰이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그것이 SNS라는 좋은 촉매제를 만나 이제는 그런 것에 더 취약한 10대와 60대 이상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예전에는 인터넷 여론은 그저 인터넷 여론이고 현실 여론은 많이 다르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인터넷 여론이 세상 여론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저 인터넷이 노사모와 같은 특정 집단을 형성하는 매개가 되는 정도에 그쳤다.


현실 여론은 여전히 인터넷 여론과 거리가 꽤 멀다. 그런데 현실 정치는 이제 더 이상 인터넷 여론과 온라인 상황을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다. 정치의 문법이 불과 1-2년 사이에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박지원이 정치9단이라는 건 한때는 자타공인의 이야기였지만 이제 코웃음 칠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기성 정치인이 시도하는 그 어떤 정치적 공작도 자기들 뜻대로 되먹지가 않는다. 청문회장에서 공격수 역할만 신나게 하면 되던 국회의원들이 문자폭탄을 받게 되고 신나게 공격 당하게 되었다. 그 이면에는 당연히 시민의식의 성장도 있지만, 그걸 지지해 주는 수단은 인터넷의 역할이 지대하다. 기존 대한민국의 정치공학이라는 것 자체가 완전히 흔들렸고, 거기에 적응못한 기존 정치인들의 삽질과 헛발질, 각종 추태는 비웃음 거리가 되었다. 자유한국당이 아예 막나가는 방향으로 노선을 잡게 된 것도 기성 정치공학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10대-20대의 온라인과 60대 이상의 온라인 세상은 극명하게 갈렸고, 또 남자와 여자가 갈렸다. 현실 여론은 몇 년전과 비교해도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온라인 세상은 난리법석이다. 정말 최근에 극적으로 달라진 것은 10대와 60대 이상이 정치 이야기를 온라인을 통해 하고 있다는 것이다. 10대는 여물지 않아서, 60대 이상은 대다수가 배운 게 없어서, 이들의 여론은 상상초월로 극단적이고, 또 대부분은 글의 기본적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을 정도로 수준 이하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가짜뉴스는 대단히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실 여론은 그렇지 않다는 말은 이제 잘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그들이 온라인에서 받은 영향이 아직 현실 여론에까지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가장 정치적 영향력이 큰 경제활동 집단인 30-50대가 온라인 여론을 일일이 쫓아갈 시간이 없어 오히려 영향을 덜 받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온라인 여론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이게 정말 만약 현실여론까지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면, 그건 진짜로 나라가 반목과 갈등으로 뒤집어지는 것이다.


인터넷 여론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오늘은 가짜뉴스 이야기만 하자. 가짜뉴스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다. 이런 가짜뉴스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진짜뉴스'로 극복하고자 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정론이다. 기성언론이 팩트체크도 예전보다 열심히 하고, 또 진짜뉴스를 신속하게 알리는 게 자명한 대처법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효과가 있을까. '진짜뉴스'라는 건 무엇이고 그런 게 있기나 할까.


팩트체크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나는 팩트체크만으로는 그 극단적인 가짜뉴스 추종자들을 결코 궁극적으로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전 글들에서 계속 써왔지만, 첫째 팩트체크는 한계가 있다. 너무나 명확한 홀로코스트를 없다고 주장해도 반박하기가 마냥 쉽지는 않은 게 팩트라는 것의 본질이다. 팩트를 철저하게 검증하겠다는 건 제대로 된 법정싸움을 해보겠다는 것과 같고, 엄청난 시간과 치밀성이 필요한 일이다. 수많은 사안에 이렇게 대처할 수는 없다. 둘째, 가짜뉴스는 자극적이기 때문에 퍼지는 것이며 팩트체크는 그저 그걸 억제하는 방어적 수단에 그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흥미로워서 퍼지는 가짜뉴스를 막기 위해 차갑게 대처하는 처방이 원천적 처방이 될 수는 없다. 게다가 가짜뉴스는 보통 없는 사실을 지어내는 것이니까, 가짜뉴스가 퍼지기 전에 미리 예방적 팩트 보도를 할 수도 없다.


사람들에게 '정치 논쟁에 답이 있을까' 하고 물어보면 대개는 '그건 답은 없지'라고 답하면서도 개별 정치 사안에 사실상 '답이 있다'고 대처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팩트를 갖다 대면 정치 논쟁이 끝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팩트를 갖다 대니까 상대는 또 그 팩트를 다시 의심하고, 상충되는 다른 팩트를 들고 오고. 다시 그 새로운 팩트를 체크해야하고, 그러다보니 본질은 흐려지고 팩트 논쟁만 하게 된다. 이게 기성 정치인들이 국민을 본질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그렇게나 많이 써먹던 수법이다.


팩트는 그 어떤 정치적 판단에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팩트는 그저 팩트인 것이다. 정치적 가치가 결부되지 않으니까 우리가 '객관적 팩트'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팩트는 정치 판단에 있어 필요조건이지 결코 충분조건이 아니다. 즉, 팩트가 충분히 확보된 상황에서 바람직한 논쟁이 시작되는 것이지 논쟁을 결정적 팩트로 마무리하는 게 결코 아니다.


물론 우리는 그 필요조건이 너무나 충족되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와서, 팩트 체크는 여전히 중요하긴 하다. 박근혜 정부가 제일 나쁜 게 바로 팩트를 까놓지 않는 세상을 만들었다는 데에 있었다. 일단 팩트가 적당히 확보되어야 의미있는 정치 논쟁을 할 수 있을 텐데, 팩트 체크에 열올리다 상황을 지리멸렬하게 만들었고 결국 모두가 지친상황에서 결정은 자기들 마음대로 했다. 내가 문재인 정부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거는 것은 쓸데없는 팩트논쟁이 줄어든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팩트가 충분히 충족된 다음 세상에 대해 준비가 안 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가짜뉴스에 여전히 휘말린다. 내가 지금까지 본 모든 가짜뉴스는 단 한 마디로 그 성격을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이 만에 하나 사실이라 하더라도 별로 시사점이 없는 것'


가짜뉴스가 사안의 핵심 팩트를 왜곡할 일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그건 그야말로 핵심이기 때문에 팩트체크도 쉽게 되며,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확산이 가로막힐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본 가짜뉴스란 그 사안을 판단하는데 '별 상관도 없으면서 자극적이기만 한 것들' 뿐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휘말리거나 아니면 반대 입장에서 그걸 보고 분노한다.


가짜뉴스가 정치에 대해서 주로 건드는 '자극적인 사항'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정치인의 도덕성 관련 이슈, 정책에 대한 왜곡된 수치와 내용, 음모론. 보면 알겠지만, 가짜뉴스가 어려운 게 이런 사항들이 진짜인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사항은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별로 시사점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통 가짜인 줄 알았다가 사실로 밝혀지는 일은 반드시 '그게 사실이면 시사점이 큰 것들'이다.


이 쯤에서 정치인의 도덕성을 이야기하자. 정치인이, 지도자가 도덕적이어야 할까. 너무 당연하게 보이지만, 그게 별로 당연하지 않던 시절도 많았다. 전근대 정치에서는 개인적으로는 부도덕하더라도 좋은 업적을 낸 위인들도 많다. 그게 현대 기준에서 부도덕하다고 그 사람의 업적을 전부 까내려야 하는가. 그건 미개하고 잘못된 일이었는가.


내가 저번 글에 마키아벨리를 칭송하였는데, 그 핵심 중 하나는 마키아벨리가 받는 평가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와 도덕을 분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왜 우리는 정치에 도덕을 요구하는가. 우리가 정치에 요구하는 도덕은 무엇인가. 자유한국당이 부도덕 성추행범 도둑놈 집단이기 때문에 없어져야 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나는 결코 그 포인트가 자유한국당이 없어져야 할 명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한국당은 파쇼집단이기 때문에 없어져야 하는 것이지, 불법 범죄자 집단이라 없어져야 하는 게 아니다. 자유한국당 모든 의원이 만에 하나 완전히 깨끗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지금의 자유한국당이 민주주의에 해가 되는 파쇼 집단을 표방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게 정확한 판단 기준이다.


나아가서, 나는 솔직히 정치인에게 도덕성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나는 도덕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둔다. 무슨 이야기냐면, 도덕성을 지도자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은 철저하게 반대하고, 우리 사회가 도덕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지지한다.


이게 모순되어 보일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도덕성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는 이야기는, 타인을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이른바 '일반 도덕'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해야 한다. 그 일반 도덕이 무엇이냐 하는 것부터 엄청난 논란 거리일 뿐만 아니라, 그 범위가 엄청나서 누구든지 어떻게든 걸리게 되어 있다. 게다가 법 테두리를 벗어나기 시작하면 별 놈의 것이 다 시비거리가 된다.


성경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고 한 것은, 당연하게도 우리에게 죄 없는 사람이 되라는 게 아니고 죄 없는 사람이 없으니 그런 걸로 다른 사람을 재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재단하지 말라는 말도 성경에 있다. 그러니까 누가 더 더럽네 마네 할 일도 아니고, 한 두 개 사안으로 사람을 쓰레기를 만들거나 자비롭게 봐주거나 할 일도 아니다. 김무성이 노룩패스한 게 진짜 꼴보기 싫기는 하지만, 단지 그 것 하나로 김무성을 갑질쓰레기로 치부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박정희가 잘못한 걸 설명할 때 여자와 재단비리 이야기가 핵심인가? 전두환이 잘못한 걸 설명할 때 29만원이 핵심인가? 그게 아니어도 할 말이 너무나도 많고 그 쪽이 더 핵심이다. 박정희, 전두환이 만에 하나 정말 깨끗한 사람이면 그들의 모든 과가 용서가 되는 일인가 말이다. 반대로 노무현 대통령이 행여 정말 가족 비리가 있었다 하더라도 노무현 대통령의 공이 다 없어지고, 다른 과를 모두 제치고 그게 최대의 과가 되느냐 이 말이다. 도덕성 논쟁은 그저 자극적인 사항일 뿐이지 결코 핵심이 될 수 없고 그래서는 안된다.


누구든지 도덕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의미는 죄를 짓지 말고, 일반 도덕을 100% 준수하고 살라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도덕성은 이 사람이 자신의 행동을 다른 누군가가 똑같이 했을 때 받아들일 수 있는 행동을 하는가 아닌가로 규정된다. 경대수가 욕을 먹어야 한다면, 똑같은 위법 의혹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도덕'의 기준으로 판단하려고 했다는 데에 있다. 자유한국당 하는 짓이 꼴보기 싫은 것은 더 큰 도둑놈들이라서가 아니라, 자기들도 하는 일을 빌미로 공격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이전의 많은 민주당 의원들도 꼴보기 싫은 짓을 많이 했다.


나의 도덕성 정의에 이런 의문을 가질 지 모르겠다. "그럼 나는 남들이 뇌물 받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뇌물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도덕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건 '나'와 '남'이 모두 뇌물을 받아먹는 위치에 있는 동질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실상 '나의 입장'만 생각한 것이 된다. 여기서 '남'을 생각하려면 '뇌물을 받을 수가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야 맞다. 그 사람들 입장에서 뇌물은 공정경쟁을 저해하고 부당이득을 취하는 정말 나쁜 일이 된다.


위장전입도 그렇게 생각했을 때 여전히 나의 '도덕성 정의'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병역문제도 마찬가지고, 문준용 논란도 마찬가지다. 내가 생각하는 도덕성의 정의가 바뀌었다고 해도 '일반 도덕'상 부도덕했던 것이 도덕적인 것으로 되는 건 거의 없다.


다만, 우리가 지도자에게 도덕성을 요구하는 이유는 조금 더 명확해진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헤아릴 줄 아는 것. 자신이 가지게 되는 권력과 유리한 위치에서도 여전히 다른 사람 입장에서의 정당성을 생각할 줄 아는 것. 그래서 권력을 이용하여 부당한 일을 하지 않는 것. 이게 내가 생각하는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도덕성의 본질이다. 그러니 이낙연이나 강경화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그런 부도덕한 일을 해왔는지, 그리고 그런 일들에 대해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는지. 이게 중요하다.


물론 이런 도덕성의 기준도 여전히 애매하고, 답은 없다. 그리고 여전히 새로운 도덕성 기준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절대적인 판단 기준이 된다고 보지 않는다. 지도자와 지도층의 행동에 우리가 제기해야 하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사안별보다는 시스템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시스템이 방조하거나 권장하는 범죄가 정말 나쁜 것이다. 병역 비리도 그게 사실상 시스템화 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런 여지가 있다면 그럴 수 없게 시스템을 만들면 된다. 그런 것에 노력을 기울이는가 기울이지 않는가가 개인의 도덕성보다 더 중요한 판단 준거다.


문재인이 잘하고 있는 건 부도덕을 차단하는 열린 시스템을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하는 것을 모두 까놓아 확인할 수 있게 하고, 또 부당하게 공금 활용하던 것을 사비로 돌려 놓는 것. 부도덕을 방조하는 시스템을 하나씩 개선해 나가는 것. 이걸 잘하는 것이지, 문재인 본인이 백색의 성인 군자인게 포인트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박근혜가 뇌물을 받은 게 포인트가 아니고, 우리나라 시스템을 망쳐놓았다는 게 포인트다.


정치를 판단할 때 도덕을 한 발짝 벗어나 보면 가짜뉴스도 시시하고, 정말 중요한 것이 보이게 된다. 도덕성 논쟁, 팩트 논쟁은 절대 답이 나오지 않고, 오늘 내가 공격하면 내일 내가 공격받을 수 있는 그런 지난한 것이다. 새정치는 별다른 게 아니다. 이미 16세기에 제시되어 있었다. 도덕, 이념을 떠나 시스템적 측면으로 정치에 접근하는 것. 그게 새정치고, 그걸 염두에 두면 이렇게 극단적인 논리로 온라인에서 싸울 일도 없다.


마키아벨리즘이 도덕과 정치를 분리했기 때문에 '부도덕'한 것으로 오해받은 것처럼, 도덕성을 분리하자는 말이 '부도덕을 방치'하자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궁극적으로 '열린 시스템'화 된 부도덕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열린 시스템을 지향하기만 하면 이전에 부도덕한 것인지도 몰랐던 것도 도덕적인 방향으로 개선된다. 기존 대통령이 공금으로 밥을 먹은 게 부도덕한 것이라고 누가 얼마나 생각했겠는가. 문대통령이 그걸 시스템화 하면서 우리는 그 일의 도덕성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지금 눈에 보이는 도덕성을 좇자고 사안에 매몰되면 나쁜정치인들은 신나게 사안을 왜곡하여 싸움을 부추기고 더 큰 시스템은 놓친다. 치밀한 시스템 설계가 먼저고, 그 시스템의 내용을 누구나 볼 수 있게 활짝 열어 놓으면 자연히 팩트논란은 완화되고 도덕성은 확보된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현대의 마키아벨리즘 응용이다. 그리고 그게 새정치다.


2017. 5. 26.


Posted by 호오님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1시간이 넘을 거라던 판결문은 22분밖에 걸리지 않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에 배려심은 넘쳤다. 필요 없는 부분에서는 무리하지 않고, 헌재 스스로를 잘 방어하면서도 스스로를 높이며, 무엇보다도 헌법적 가치에 충실한, 그래서 국민들을 존중한 좋은 판결이 나왔다.

가장 훌륭한 부분은 헌재가 인정한 파면 사유를 규정하는 데에 있었다. 더 요약할 것도 없이 정말 잘 정리되어 있지만, 키워드를 뽑자면 이런 것들이었다. 헌법 수호 의지, 법 준수, 투명한 공개, 국회의 견제, 언론의 감시, 사실 은폐의 잘못, 그리고 이번 사태에서 보여준 박근혜의 일련의 뻥치기와 버티기 행위에 대한 적시까지. 쉽게 말하자면 박근혜가 부정부패를 하고, 무능하고, 불성실하고, 직권을 남용한 것으로는 탄핵에 이르기 힘들고, 깜깜이정부 운영과 견제 무력화, 꼼수 발동이 진정한 탄핵 사유가 된다고 본 것이다. 나는 바로 이 점이 내가 늘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아주 멋있게 축약한, 내공이 엿보이는 감동 포인트라고 생각된다. 불법을 하는 게 문제가 되었다면 노무현 대통령도 탄핵을 피해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무능과 불성실은 헌재가 스스로 상대적이고 추상적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사람을 빡치게는 하지만 그렇다고 엄격히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듯이, 권력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의 정보 접근을 제한하는 것이고, 견제 세력에 정상적으로 맞서지 않고 갖은 수를 써서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정부 운영의 투명성과 견제감시의 일반화는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메커니즘에 위치해야 하는 것이며, 민주주의 헌법의 수호자인 헌재가 이 점을 아주 정확하게 집어내었다.

선고문에서는 파면사유가 되지 못하는 사안을 크게 세 가지로 언급하였는데, 문체부 공무원 사건과 세계일보 사건, 그리고 세월호다. 여기에 헌재가 선을 그은 것에 아쉬워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이러한 사건들 하나 하나가 참으로 중대하고 박근혜의 책임임이 거의 명백한 데도, 헌재가 방어적으로 나온 것이 서운할 수는 있다. 김이수, 이진성 재판관이 다른 것은 몰라도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는 후대에 경각심을 주고자 보충의견을 넣긴 하였으나 이걸로는 부족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헌법재판소 판결이 박근혜에게 처벌을 내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님을 상기해야 한다. 방식은 결국 처벌같이 내려지지만 헌재판결의 의의는 헌법수호에 있으며, 박근혜보고 잘못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의 가치가 어떻게 하면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잘 지켜지겠는가에 있다. 박근혜 사건은 워낙 상식을 벗어난 예외적인 사항이 많기 때문에, 박근혜 케이스에 한정하여 선고를 내리는 것은 오히려 이후 일어날 수 있는 교묘한 헌법 왜곡을 막기 힘들 게 할 수 있다. 시스템적 측면에서 어떤 태도와 행위가 헌법 가치를 가장 훼손하였는가를 보고 그것을 확실히 막는 것이 중요하며, 아쉽더라도 개별 사건에 대해서는 보수적으로 판결을 내린 것은 지혜로운 것이다.

따지고 보면, 박근혜가 투명하게 정부를 운영하고, 국회 견제와 언론 감시를 보장하면서, 정상적인 절차와 법, 헌법을 존중하며 일처리를 했다면 이 모든 사건이 이딴식으로 진행될 수가 없었음이 자명하다. 그러니, 개별 사건에 대해 구체적인 못을 박지 않았다고 전혀 서운해 할 이유가 없다. 생각해보자. 또 대형사고가 터졌을 때, 앞으로의 대통령에게 성실하게 대처하라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일지, 아니면 대통령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우리가 아는 게 더 중요한 일 일지를. 성실한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분명 대통령이 무언가 성실하게 했는데, 정확히 뭔 일을 했는지는 의아하고 결과적으로 삽질만 한 것 같아 보인다면, 그 땐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그게 이명박이었다. 그런 식의 접근으로는 이명박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보공개와 견제/감시보장이 훨씬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황당했던 것은 테러방지법의 발의자였던 법사위원장 권성동 의원이 선고 직후 나와서 제왕적 대통령제 폐해 운운하며 개헌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또한 헌법재판관 중 한 명인 안창호 재판관의 보충의견도 전문을 보면 개헌 이야기가 녹아져 있다. 나는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박근혜 탄핵 심판 선고의 의의는, 이 사태가 6공화국 헌법의 결점, 즉 제왕적 대통령제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이 아니라, 6공화국 헌법 하에서도 박근혜의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87년 체제의 가치로 판단해도 박근혜는 용인해서는 안 될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니 87년 체제가 원칙적으로 잘못된 게 아니라, 87년 체제가 좀 더 제대로 굴러 가게 보완만 하면 된다고 결론을 내야 맞다. 여기에서 갑자기 제왕적 대통령제 운운하며 87년 체제의 핵심인 대통령직선제를 뒤흔드는 방식의 개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견강부회의 극치다. 개헌을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보완 측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직선제를 유지하며 4년 중임제로 간다든지, 이번 사태에서 박근혜 측이 하도 진상을 부려서 무더기로 발견된 많은 법률상 헛점들을 메운다든지, 국정 투명 운영 강화 조항을 넣는다든지 하는 정도로 족하다.

그래서 나는 이 판결이 9차 헌법, 87년 체제의 진정한 가치를 30년만에 완성시킨 명판결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이로써 일차적 완결성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전세계에 길이 남을 민주주의 역사를 썼다. 국민이 진정한 주인이 되었고, 삼권 분립도 그 의의를 이번에 드디어 확실히 찾았다. 이번 판결을 정치적, 여론 순응 판결이 아닌, 대한민국 민주주의 가치의 완성 측면에서 평가하여야 하며, 이 가치가 향후 정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호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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