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에 대하여

Essay 2011.06.22 21:20


논쟁에 대하여: P-D Theory II

  

논쟁은 사회 작동의 가장 핵심요소이다. 인간이 언어라는 것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논쟁은 있어왔고, 민주사회가 형성된 현대에 와서는 논쟁이 거의 모든 ‘사회적 결정’을 도맡아 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점은 논쟁이라는 단어의 함의에 있다. 논쟁은 ‘언쟁’과는 조금 다르다. 그저 말싸움을 뜻하는 언쟁과 달리 ‘논쟁’이라는 말에는 ‘論’자가 들어가 있으며 이는 곧, 논쟁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에는 ‘論理’가 필요함을 간접적으로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나의 임의적 해석이 결코 과장되지 않다고 생각한다.

   

 

논쟁의 제 문제

 

문제는, 많은 ‘심각한 결정’ 또는 ‘심각한 논의’들이 실제로 ‘언쟁’ 수준에 불과한데도 ‘논쟁’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쟁과 달리 논쟁은 실제로 아무나 할 수 있는 분쟁 해결 방식이 아니다. 논쟁으로 어떤 사실을 결정하거나 어떤 논리, 또는 어떤 사고방식, 어떤 행동의 합리화를 하려면 엄밀하게 논리적인 과정을 통해야 마땅하지만, ‘엄밀한 논리’라는 것은 생각보다 상당한 연습과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엄밀한 논리에 대한 학습 및 연습을 해 본 바가 거의 없으며, 실제로 이에 대한 필요도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 중책에 앉아 논쟁을 통해 의사 결정을 하고 있거나, 인기를 등에 업고 비논리를 설파하거나, 혹여 본인은 진실이라고 믿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각종 거짓 논리로 혹세무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논리적 논쟁’이 팽배해 있기 때문에 정작 논쟁을 할 자격이 되는 사람들의 ‘어려운 논리’는 묻혀버리기 일쑤가 된다. 이 사실에 추가적인 문제가 있다. 논쟁은 ‘재판’과 다르기 때문에 A와 B의 논쟁이라면 A가 B를 논리적으로 제압하면 그만인데, 대부분의 ‘실제 논쟁’에서는 A, B 뿐만 아니라 C라는 배심원들이 있어서 논쟁의 ‘논리’를 흐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C들은 확률적으로 자연스럽게도 대부분이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잘 모르는 말’을 늘어놓는 사람보다는 ‘이해가 빠른 교묘한 비논리’를 쓰는 사람의 손을 들어주기 십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정말 논리적인 논객 A는 인기인 논객 B에게 ‘논리적으로 논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판정패를 당하는’ 억울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 했지만 정말, 진짜로 큰 문제는 바로 어쭙잖은 논리를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는 자신이 ‘논리 있는 논객 A’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실상 ‘즉석 논쟁으로 해결 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에 기인한다. 논쟁이라는 것이 거의 대부분 ‘즉흥적’이거나 ‘짧은 시간’에 ‘소수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만약 논쟁으로 해결될 법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해결된 경우가 많고, 그것이 아니라면 짧은 논쟁으로는 해결이 나지 않기 때문에 이미 ‘연구’의 단계로 들어선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회 분쟁을 예로 들면, 논쟁으로 금방 끝날 것 같은 문제는 법에 성문화 된 경우가 대부분이라 논쟁의 가치가 떨어지며, 만약 논쟁거리가 된다고 하면 그건 당사자 간의 논쟁으로는 해결되지 못할 ‘큰 문제’ 또는 ‘복잡한 문제’일 경우가 태반인 것이다. 즉, 논쟁이라는 것은 결국 많은 경우에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즉석 논쟁을 즐기는 ‘논객’이라 칭하는 사람들이 진실로 ‘논리적’이었기는 힘든 것이다. 정말 논리적인 사람들은 이미 그 논쟁을 학문화 시켜 논의를 진행 중이거나 또는 반대로 그 논쟁은 ‘논쟁거리가 안 된다’고 생각하고 접었을 공산이 크다.

 

논쟁의 창조적 역할 중 하나: 문제 판별 기능

 

그렇다면 논쟁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논객은 그저 시끄러운 무리에 불과한가 생각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논쟁의 의미는 논리와의 구별 점에서 찾아야 한다. 논리는 ‘기존 정보를 조합해서 새로운 결론을 얻는’ 창조적인 활동이다. (논리의 이 역할은 비단 자명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에 대한 글을 간략히 쓴 적이 있고, 이를 토대로 이에 대한 자세한 서술을 조만간 제대로 정리해서 보일 생각이다.) 따라서 논쟁의 본질도 ‘새로운 결론’을 얻는 데에 있어야 하나, 위에서 서술했듯 대부분을 차지하는 즉각적인 논쟁들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다행히도, 이러한 역할을 놓친 대신 ‘논쟁’을 해봄으로써 우리는 ‘어떤 것을 문제 삼아야 하는가.’라는 다른 방식의 창조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문제를 떠올리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논쟁을 해봄으로써 이것이 ‘문제다운 문제’인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많은 논쟁은 ‘결론’을 내는 데는 실패할지언정, 그 과정에서 많은 의미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시작하려고 들면, 그 과정 속에서 ‘문제 정의’가 확실해 지며 이 때 1차적으로 ‘문제가 문제다운지’를 알 수 있다. (문제의 성립 여부 판별) 문제 정의가 끝나면, 문제에 대해 실제로 논리적 논의가 가능한 상태인지를 알아봐야 하는데 이 때 2차적으로 ‘문제가 문제다운지’를 알 수 있다. (문제의 논리적 가치 판별) 이 때 찬반이 명확히 나뉜다면 논리 전개를 통해 어떤 것이 참인지 접근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게 된다. 각 논지의 진릿값 판별이 가능해 진다면 논쟁은 해소가 된 것이지만, 만약 그것이 당장엔 불가능해 보인다면 이 때 3차적으로 ‘문제가 문제다운지’를 또 알 수 있게 된다. (문제의 복잡성 판별) 여기까지 거치면 논쟁은 이미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해 버렸거나 아니면 논의를 확장하여 인류의 창조 영역을 넓혔기 때문이다. 논객의 역할 역시 여기까지 수행할 때 그 빛이 난다.

  

하지만 여기서 볼 수 있듯이 결국 논쟁이 실제로 그 가치를 가지려면 여전히 ‘엄격한 논리’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은 피할 수 없다. 그렇기에 여기에 어떻게 진행되는 논쟁이 진정 ‘논쟁’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지를 서술하고자 한다. 이 기준에 맞지 않게 진행 되는 논쟁은 ‘소모적인 논쟁’으로서 인류의 창조 활동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활동이 되며, 또한 논리적 과정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 논객은 ‘궤변론자’로서 ‘발전적인 논쟁’을 ‘소모적인 논쟁’으로 바꾸는, 인류의 지적 발전에 오히려 악영향을 주는 사람들이라 볼 수 있겠다.

 

논쟁의 ‘논리적’ 정의

 

일단, 논쟁을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하겠다. 논쟁을 정의하는 것 자체가 ‘논쟁거리’가 될 수 있기에 최대한 상세하고 논리적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논쟁을 정의하는 것만으로 논쟁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고,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 지를 다 이야기 할 수 있다. ‘정의’만으로 가능한 모든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 진정 ‘논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논쟁을 엄밀히 논리적으로 정의하는 것이 맞겠지만, 일단은 일상어를 도입하여 논쟁을 정의하고자 한다. 논쟁은 ‘합의를 통해 명제 A의 진릿값을 찾는 논리 전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정의는 metalanguage를 사용한 것이다. 국어사전에서는 ‘둘 이상의 사람이 자기주장을 말이나 글로 다투는 것.’이라고 하는 논쟁이지만, 이 정의에서 논쟁의 주체인 갑과 을은 다투는 것이 아닌 ‘합의’를 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이것은 여기서 정의 된 논쟁이 어디까지나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충분히 논리적이라면 서로의 엄밀한 논리 전개에 즉각적으로 찬성을 할 것이고 협력적으로 결론을 향해 도달하려 노력하게 되므로 실제로 ‘다툼’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이 정의가 주는 뉘앙스를 통해 논쟁이 소모적인 ‘언쟁’과는 다른, 발전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이 될 수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반면, 이 정의를 잘 보면 ‘갑과 을의 구별’은 직접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다. 즉 갑이 A라고 주장하고 을이 ~A라고 주장하였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서술되어 있지 않다. 이는 곧 이 정의에서 ‘누가 무슨 주장을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것이 사실상 ‘논쟁’의 metadefinition의 당위성에 힘을 실어 준다. ‘어째서 완벽히 논리적인 사람인 갑과 을이 서로 다른 주장을 했는가.’라는 질문에 간접적인 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식 구조가 다르다는 것이 그 답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더욱 자세히 다루겠지만, 갑과 을의 지식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그들은 ‘논쟁’을 통하지 않고서는 혼자서 논리 전개를 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논쟁’을 통해서도 결론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논리 전개 과정으로서의 논쟁

 

이 정의를 완벽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논쟁의 정의에 등장하는 ‘논리 전개 과정’이라는 용어를 정의할 필요가 있다. ‘논리 전개 과정’은 모든 ‘참인 명제의 나열’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있으면 Modus Ponens를 통해 간단히 명제 의 진릿값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특정 진릿값 함수 v에 대해 v(C)=1 (명제 C의 진릿값이 1이다: 명제 C가 참이다.)라고 하면, 논리 전개 과정은

 

C

C→B (이 때, v(C→B)=1 )

B→D (이 때, v(B→D)=1)

D→~A (이 때, v(D→~A)=1)

 

의 4개의 명제 나열로 볼 수 있다. 이 4개의 명제 나열을 통해 ~A가 참이고 따라서 A는 거짓임을 알 수 있다. 즉, 이 나열 자체가 곧 ‘논쟁’이 된다. 이 때, Modus Ponens의 역할이 빛난다. Modus Ponens란, ‘긍정식’으로 번역되곤 하는 용어로서 만약 P가 참이고, P→Q가 참이라면, Q가 참이라는 아주 당연한 항진명제를 의미한다. 위의 예의 과정은 철저히 Modus Ponens를 통해 ~A의 진릿값을 찾게끔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렇기에 이 과정은 논리적으로 엄밀한 과정이 된다.

  

이러한 ‘논리 전개 과정’이라는 것이 논쟁의 핵심이기는 하나, 논쟁이 결코 위와 같은 명제의 나열만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논쟁은 그 정의에 서술 되었듯이 ‘합의’와 ‘찾기’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합의’ 부분이 논쟁과 일반적 논리 증명과의 구별 점을 명확히 하며 ‘논쟁’이라는 단어가 metalanguage로 서술될 수밖에 없는 단초를 제공한다.

 

‘증명’이라는 것은 이미 문제가 명시화 되었을 때 정의가 가능하다. 즉, 명제 를 증명하기 위한 가정들 가 이미 주어져 있는 상태에서만이 증명의 정의가 가능한 것이다. J. Robbin이 소개한 명제논리 하에서의 ‘증명’의 수리논리학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정의) 가정 A1, A2, ... ,An 으로부터의 Bm의 증명은 명제열 B1, ... , Bm 이 있어서 자연수 1≤k≤m 에 대해 다음 성질을 만족하는 것이다.

 

1. Bk는 Aj (1≤j≤n)이다.

2. Bk는 공리이다.

3. 1≤i,j<k가 있어 Bi가 [Bj→Bk]이다. (Modus Ponens)

 

보이듯, 여기엔 사용할 가정들이 ‘이미’ 정해져 있어 이 정의를 그대로 논쟁에 가져다 쓸 수는 없다. 만약 무책임하게 ‘명제 A를 임의의 가정으로부터 증명하는 것’을 논쟁이라고 해 버리면 문제가 많다. 가장 간단한 예로, A 자체를 가정으로 두어 버리게 되면 A→A가 되어 A가 증명되어 버린다. 이는 ‘내 말이 맞으니까 맞다.’는 억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어떤 명제를 ‘가정’으로 사용하여 A의 진릿값을 판별할 것인가는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논쟁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갑과 을이 ‘서로 인정할 수 있는’ 곧 ‘합의 된’ 가정을 사용하여 증명을 하는 것이 논쟁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것이다.

 

합의로서의 논쟁

 

‘합의’라는 metalanguage를 조금 더 논리적으로 변형하면, ‘유일한 진릿값 v’라고 할 수 있다. 즉, 갑과 을이 ‘합의하에’ 정의한 진릿값 함수 v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논쟁이라는 말이다. 진릿값 v의 정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수리논리학에서의 진릿값의 정의를 첨부한다.

 

정의) 진릿값은 v:P→{0,1}인 임의의 함수로서, 이 때 P는 모든 단순 명제 pi의 집합이고 다음 조건을 만족한다.

 

1.v(f)=0

2. v(A→B)=1 if v(A)=1 and v(B)=0

    v(A→B)=0 otherwise

 

여기서 단순 명제 pi라는 것은 수리논리학에서는 a∈b인 모든 명제를 의미하지만 우리가 사용할 정의에서는 일상어를 포함하는 조금 더 넓은 의미로서 그냥 ‘모든 명제’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모든 명제에 대해 갑과 을이 생각하는 진릿값이 있겠지만, 이 중에 서로 같은 진릿값을 갖는 부분만 P의 원소로서 인정하면 말끔하게 정의가 된다. 당연히, A→A같은 문제도 발생할 여지가 없다. 1, 2번 조건은 진릿값으로서는 자명한 조건이다. 1번에서 f는 항상 거짓인 명제를 의미하여, 사실상 ‘거짓으로 인정되는 명제가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2번은 ‘거짓을 가정한 논리는 참이다’는 논리학의 기본 성질을 간접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이 ‘논쟁’에서 ‘합의’의 의미는 갑과 을이 공통의 유일한 v를 찾는 과정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논쟁’이 이상적일 수는 없는 단초도 제공된다. 만약 갑과 을이 완벽하게 논리적이라면 진릿값의 정의는 무의미해지고, 항진명제인 몇 가지만이 P의 원소로서 인정될 것이다. 하지만 ‘논쟁’이 다루는 일상 명제는 수리논리 세계에서 해석되지 못하는 것이 수도 없이 많고 항진명제로 풀 수 없는 것이 또한 수도 없이 많다. 바꿔 말하면, 현실세계에 ‘공리’는 몇 개 되지 않는다. 따라서 특정 v를 설정하지 않으면 문제를 풀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특정 v의 설정이 곧 합의이며, 이 때 바로 위에서 말했던 ‘문제의 논리적 가치 판별’ 과정이 일어난다.

특정 v의 설정이 넓고 빠르게 될수록 논쟁은 활기를 띄고 결론을 향해 순항하게 되지만, 만약 특정 v의 설정이 아주 제한적이고 잘 되지 않는다면 논쟁은 난항을 겪고 제자리걸음하기 쉽다. 특히 형이상학적인 논쟁들이 주로 후자에 속하기 때문에 결론이 안 난다. 신의 존재를 가지고 논쟁하는 두 사람 간에 합의 된 v를 설정하는 것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신이라는 개념은 찬이건 반이건 특성 상 ‘가능한 모든 명제’에 진릿값을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다. 따라서 신 옹호론자의 진릿값 v는 이미 신의 존재를 옹호하게끔 조정되어 있으며, 반대론자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된다. 정치 논쟁도 비슷하다. 정치 논리는 또한 그 특성상 전 사회에 걸친 ‘대부분의 명제’에 각기의 진릿값을 스스로 부여 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 논리에서 실제 정책의 타당성 또는 도덕성에 관한 ‘잘 보이는 명제’들을 제쳐 놓고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철학적이고 ‘원론적인 명제’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그 명제에 대한 진릿값 합의 하나 하나 부터가 아주 어려운 문제가 될 수 있다.

 

논쟁은 합의가 이루어지기 힘든 속성이 있기 때문에 난항을 겪는다

 

이렇듯 ‘논쟁’의 대부분은 유일한 v를 찾는 데에 가장 큰 난관이 있다. 이 과정이 잘못 되면 문제가 확대 재생산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예를 들어, 명제 A에 관한 논쟁을 하기 위해 갑이 새로운 명제 B를 도입하여 v(B)=1, v(B→A)=1을 제안하였는데, 을이 v(B)=0임을 주장해 버리면 결국 이는 명제 B에 대한 새로운 논쟁이 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논쟁은 논쟁을 낳고 결국 합의점 하나 없이 논쟁이 소모적으로 끝나는 것이다. 비논리적인 사람이 논쟁에 끼면 이 문제가 더 황당하게 확대 된다. 예로, 갑이 실제로 을도 인정할 만한 v(B)=1을 제안했다고 하자. 이를 통해 논쟁은 갑의 승리로 끝날 수 있다. 그런데 이 때 을이 엉뚱하게 명제 A와 비슷한 일상어를 공유하는 명제 C를 들고 와 v(C)=1을 제안하고 나선다. 그리고 이에 갑은 v(C)=0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이 과정에서 이미 명제 A에 대한 논쟁은 갑의 승리로 끝날 수 있었음에도 둘은 엉뚱하게 명제 C에 대한 논쟁에 열을 올리게 된다.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논쟁을 건설적으로 하려면 v에 대한 판별만을 빠르게 진행하여야 한다. 즉, v(B)=1을 제안했을 때, 만약 상대가 v(B)=0이라고 주장하면 서로의 견해 차이를 인정하고 B를 포기한 채 빠르게 다른 명제 C를 찾아 다시 제안하여야 하고, 반대로 만약 상대가 v(B)=1이라고 동의하면 합의가 된 것이므로 그를 통해 문제 해결 방안을 찾으며, 만약 B의 진릿값에 대해 상대가 즉각적인 대답을 못하면 v(B)=1을 통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음을 제시하여야 한다.

 

여기서 마지막 경우일 때 논쟁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가 또 발생한다. 제안 된 v(B)=1에 대해 상대가 고민을 하자, 이를 설득하기 위해 v(P)=1 등을 가져와 P로부터 B를 증명하려 드는 것이다. 이것이 위험한 것은 상대가 B에 대한 판단이 되어 있지 않아 있다고 해서 P에 대한 판단도 안 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잘못하면, v(P)=0으로 상대가 반발하여 엉뚱한 논쟁을 또 재생산할 수 있다. 심한 경우엔, 비논리적인 상대를 만나 단지 v(P)=0이라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v(B)=0이라고 확신하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논쟁은 난항을 거듭하게 되며, 시간이 길어져 결국 논쟁의 결론을 보지 못할 수 있다.

 

‘논리 과정’ 자체에 대한 합의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합의는 A를 증명하기 위해 가정 B를 도입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국한 되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비논리적 논쟁에서는 이 뿐만 아니라 B→A라고 하는 새로운 명제 C에 대한 진릿값 합의에도 문제를 야기한다. 물론 이 명제 C에 대한 진릿값 합의가 이상적인 논쟁의 경우에도 난항을 겪을 가능성은 있다. C가 가지는 B→A 형태의 많은 명제가 ‘정리 Theorem’와 비슷한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이 정리가 공리로부터 잘 증명 되어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아직 증명이 되지 못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상적 명제로서의 C의 진릿값을 판별하자고 하면 더 문제가 된다. 일상적 명제들에는 ‘공리’라 인정 되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개별 논쟁에는 큰 장애물이 되지는 못한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B나 B→A라는 명제가 각각 어떤 진릿값을 가지는 가는 같은 수준의 문제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B라는 명제를 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일 것이나, B→A라는 명제는 일단 대부분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고, 이를 참으로 받아들일 때는 이를 ‘이해’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만약 한 쪽이 이것이 ‘숨겨져’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또한 이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논쟁이 진행되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진다. 이 과정이 안 되는 사람은 논리적 사고에 익숙하지 못한 ‘비논리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음지에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재야 사학자와 기성 사학자들 간의 논쟁에서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다. 조금 감정적인 대응이 예상 되는 예이므로 상당히 변두리의 문제를 가져 오겠다. 일부 재야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명제 중 하나는 ‘금(청나라의 전신)은 신라의 후손이다’라고 하는 명제 A다. 여기에 쓰이는 가정은 ‘금 태조가 신라 출신이다’라고 하는 일부 사서의 기록인 명제 B이다. 여기서 우리가 일단 이 명제 B의 진릿값이 1이라는 점을 어떻게든 합의했다고 하자. 문제는 v(B→A)=1인가하는 것이다. 일단 이 명제는 논의에 숨겨져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명제임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A의 진릿값 판별을 위해 내세운 다른 가정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v(B→A)=1임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일상어에 대한 정의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여기에서는 ‘후손’이라는 용어가 가장 중요하다. 만약 이게 ‘금의 왕족이 신라의 후손’이라는 말이 된다면, v(B→A)=1임은 상식적으로 인정되고 따라서 v(A)=1로 인정되어 이 주장은 맞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금이라고 하는 국체가 신라의 후손’이라는 말이 된다면 일단 말이 애매해질 뿐만 아니라 반드시 v(B→A)=0이 된다. 왜냐하면 B로부터는 ‘왕족이 후손이다’라는 것 이상의 말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논리 구조를 그대로 가져가면, ‘잉글랜드는 독일의 후손이다’ 라고 하는 A'에 대해 ‘현 왕가인 윈저가는 하노버가의 후손이며 하노버가는 독일에서 건너온 왕가이다’라는 B'을 가정으로 내세워 A'을 증명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도 ‘잉글랜드 왕가가 독일의 후손이다’는 것은 참으로 합의할 수 있으나, ‘잉글랜드라는 국체가 독일의 후손이다’라고 하게 되면 말이 애매해질 뿐만 아니라 일단 v(B'→A')=0이 되어 B'을 도입한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이렇듯 ‘숨겨진’ 명제를 찾지 못하고 또한 이것의 진릿값 판별에 상식적인 ‘이해’를 하지 못하면 논쟁을 진행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또한 이러한 과정 자체를 부인하거나 회피하면 역시 논쟁이 진행될 수 없다.

 

실제 논쟁에서 합의는 용어의 정의에 대한 합의 과정 역시 반드시 포괄한다.

 

여기까지는 각 명제 A, B, C 등이 깔끔히 정의되었다고 가정해 왔으나, 위의 예에서도 보았듯이 실제 논쟁에 있어서는 이 명제를 정의하는 것 자체에서부터 문제가 자주 발생한다. 이 경우는 반드시 ‘비논리적 논쟁’이다. 이상적인 논쟁이라면 명제를 정의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한다. 오히려 이상적인 논쟁에서는 용어의 정의 과정을 통해 논쟁의 가치 판별을 수행할 수 있다. 갑이 A를 주장하고 을이 ~A임을 주장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문제 정의를 명확히 해보았더니 실제로 갑은 A를 주장하는 게 맞았지만, 을은 알고 보니 A와 비슷한 일상어를 사용하는 A'에 대해 ~A'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적인 논쟁에서는 이러한 경우에 ‘문제의 성립 여부 판별’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여 본 문제가 논쟁거리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비논리적 논쟁에서는 이 과정이 생략되어 실제로 논쟁이 논쟁거리조차 되지 않는데 논쟁하는 경우가 생긴다. 소모적인 논쟁들의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문제의 엄밀한 정의를 회피하거나 모호하게 뭉개고 있다. 정치적 논쟁들이 특히나 그러하다. 인류가 몇 십 년을 다투어 왔고, 현재까지도 일부 지역에서 다투는 ‘공산주의는 비생산적이고 비도덕적 정치 행태를 수반한다.’는 식의 명제라던가 반대로 ‘자본주의는 빈부격차를 확대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수반한다.’는 식의 명제들이 그렇다. 두 명제 모두를 엄밀히 정의하는 것 자체가 상당한 깊이의 경제학 및 정치 철학 지식을 필요로 하며 이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만 수많은 가정과 세부 용어 정의를 필요로 한다. 그 때문에 실제로 수많은 학자들이 이 명제들에 대한 논쟁을 상당히 ‘건설적으로’ 해오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이 명제를 접한 사람들의 범위가 너무 넓었다는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애초에 ‘위 두 명제를 엄밀히 정의할 지적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위 두 명제의 모호하고 자극적인 문구들만이 사람들의 뇌에 기억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비도덕적, 비생산적, 빈부격차,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용어의 정의 자체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채로 논쟁에 뛰어 들었다.

 

정의가 잘 되지 않은 채로 시작된 논쟁은 당연하게도 엄청난 비효율을 보인다. 만약, A라는 명제에 대해 비슷한 일상어를 사용하는 명제가 A' 하나만 있다 하여도 문제가 삼천포로 빠질 수 있다. 갑은 누구나 인정할 만한 참인 명제 B를 들고 와 v(B→A)=1을 주장하였는데 을이 v(B→C)=1을 가져와 v(C→~A')=1을 주장하며 마치 v(A)=0인 것처럼 우기는 것이다. 갑이 명석하다면 이 비논리를 금세 파악하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비논리는 상당히 교묘하여 즉석에서 판단하기 힘들 때가 많다. 궤변론자들이 사람들을 속인 비논리가 대부분 이런 식이다. 제논의 역설만 하더라도, ‘거북이가 먼저 출발했더라도 속도가 빠른 아킬레스가 느린 거북이를 언젠가 추월한다.’는 명제 A가 당연한데도 ‘둘 사이의 거리 차이가 반 씩 줄어드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영원히 따라잡지 못한다.’는 ~A와 유사한 ~A'을 제시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실제로 ~A'은 ‘(거북이가 간 거리) - (아킬레스가 간 거리)=d 가 0으로 수렴하는 과정’만을 생각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d<0인 경우는 나올 수 없게 짜여 져 있으며, 시간을 관찰하는 데 무한한 step을 주어 마치 이것이 실제 시간이 사실 특정 시각으로 수렴하고 있음에도 무한대로 발산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교묘함이 있다. 이 경우도 제논의 반론 명제를 명확히 정의해 버리면 ‘논쟁거리’ 자체가 되지 않는다. ‘둘 사이의 거리 차이가 반 씩 줄어드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거리 차이가 0이 되기 전까지는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하며, 이 과정을 통하면 거리 차이는 0으로 무한히 수렴하게 되어 있다.’ 이 명제는 당연히 참이며, 동시에 아무런 새로운 사실도 알려주지 않고 있다. 즉 문제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반면 동시에 흥미로운 것은 우리는 이 유사 명제 A'을 통해 당시 잘 생각되지 못했던 수열의 수렴에 대한 개념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문제의 정의를 명확히 하려는 노력인 ‘문제의 성립 여부 판별’만 성실히 수행해도 우리는 논쟁의 순기능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문제를 모호한 상태로 내버려두고 엄밀한 정의를 회피하려는 행위는 논쟁의 순기능을 저버리는 ‘비창조적’인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찾는 과정으로서의 논쟁

 

논쟁을 ‘합의를 통해 명제 A의 진릿값을 찾는 논리 전개 과정’이라고 정의한 데에서 이제 엄밀하게 따져 봐야 할 부분은 바로 ‘찾는다’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 용어가 가장 모호하고 함축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논쟁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A를 증명하기 위해 B를 도입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B는 어떻게 들고 올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이것이 논쟁에서 갑과 을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갑과 을은 서로 다른 지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 지식의 양과 수준이 다를 수도 있겠으나 무엇보다 지식의 범위가 다른 것이 둘의 차이를 가장 크게 규정하는 요소가 된다. 만약 애초에 갑도 v(B)=1이자 v(B→A)=1임을 알고 을도 마찬가지라면 논쟁을 할 이유가 없어진다. 갑은 B라는 명제를 알았지만 을은 B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논쟁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갑이 B라는 명제를 안다고 해서, B→A의 진릿값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갑이 아는 것은 많은 경우에 B→C수준이며, C→A임을 논증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게 된다. 갑 혼자서 문제를 풀 수 없고 을 혼자서 문제를 풀 수 없기에 둘이 만나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많은 논쟁이 어떤 방식으로 시작하는 지도 유념해 봐야 한다. 많은 논쟁은 갑이 혼자서 B→A가 참임을 주장하면서 시작 된다. 그것을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을은 C를 들고 와 B→C이고 C→A임을 보이든지 아니면 B→C이고 C→~A임을 보여 문제를 재확인 하는 것을 요구하게 된다. 설사 갑이 실제로는 맞았다 하더라도 을이 이렇게 자신의 지식 구조를 본래 논리에 포함시키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 합당하다면 꽤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일상 논쟁에서 갑이 B→A를 보일 때는 많은 가정과 직관이 사용되기 때문에, C를 도입함으로써 가정과 직관을 푸는 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논쟁은 갑과 을이 이런 방식으로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고 연결하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갑과 을만으로는 논쟁이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갑은 B→C를 알고 을은 C→D를 알지만 A에는 도달하지 못해 D→A임을 아는 제 삼자 또는 새로운 지식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바로 논쟁의 문제 확인 세 번째 단계인 ‘문제의 복잡성 판별’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아르키메데스의 바퀴 역설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동심원 두 개로 이루어진 바퀴가 평면을 굴러갈 때를 관찰한 역설이다. 이것이 동심원이기 때문에 회전축을 공유하여 작은 바퀴는 큰 바퀴에 매달려 돌아가게 되어 있는데, 한 바퀴를 돌고 나면 큰 바퀴가 평면에 닿아 이동한 거리가 작은 바퀴가 공중에서 이동한 거리와 같으므로 두 원의 원주 길이가 같다는 논리이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이 역설을 만족스럽게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이 역설을 수학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대일대응과 무한 집합에 대한 개념이 있어야 하고 물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slip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렇듯 모든 문제가 그 때 살았던 사람들의 지식을 공유하고 연결한다고 해서 풀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의 복잡성 판별’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그리고 이렇게 논리 과정을 찾는 데 실패하면 논쟁을 멈춰야 하므로 ‘찾는다’는 말은 논쟁의 정의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용어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 더 강조할 것은 찾는다는 것의 의미는 서로의 지식 구조를 공유하여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계’하는 데에도 있다는 것이다. 지식의 연계 또는 융합은 자연스럽게도 ‘창조’와 밀접하게 관련되는 과정이다. 이야기를 쉽게 하기 위해 B→A와 같이 간단한 논리만 이야기 하였지만 거의 모든 경우에 이러한 명확한 논리는 세워지지 않는다. 대개 갑이 B를 알지만 B→A는 오리무중이고 을이 C를 알지만 C→A가 오리무중인 경우가 많다. 이럴 때 B∩C→A임이 둘의 합의 과정에서 밝혀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가장 간단한 형식의 지식 연계 또는 지식 융합이다. 이를 통해 B∩C라는 새로운 명제 D가 발견 되며 이는 어느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던 새로운 지식으로서 갑과 을, 그리고 관전자에게 주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논쟁의 가장 큰 순기능 중 하나인 지식의 확장이다. 이렇게 D를 새로 발견하면 원래 문제인 A뿐만 아니라 E라는 명제에 대한 다른 논쟁에 v(D∩F→E)=1로 답을 줄 수 도 있다. E에 대해 논쟁하는 사람들은 D를 알기 때문에 B와 C를 직접 융합하는 수고를 덜게 되는 것이다. 논쟁은 찾기와 합의 과정을 통해 이런 방식으로 지식 연계를 지원하고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낸다.

 

논쟁의 엄밀한 정의

 

‘합의를 통해 명제 A의 진릿값을 찾는 논리 전개 과정’이라는 metalanguage 정의를 지금까지 길게 설명해 보았다. 이제 논쟁의 조금 더 엄밀한 정의를 소개하고자 한다. n명의 사람이 명제 A의 진릿값에 대해 벌이는 논쟁은 다음과 같이 metalanguage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명제의 모임 Pi에 대해 어떤 X∈P(∪Pi)가 있어 유일하게 정의 된 진릿값 함수 v: X → {0, 1}에 대해 v(A)=1 또는 v(A)=0임을 증명하는 것

 

이 때, P(·)은 power set 연산자이다. Pi는 사람 저 마다의 지식 구조를 의미한다. 이 안에는 여러 가지 명제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를 공유하는 것이 합집합 기호 ∪의 의미이고, 융합하는 것이 멱집합 연산 기호 P(·)의 의미이다. 이를 통해 X라는 명제 집합을 구성하는 것으로 ‘찾기 과정’이 끝난다.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바로 이 X를 통해 유일한 v를 구축하는 ‘합의 과정’이다. 합의가 잘 되지 않으면 X를 다시 찾아야 할 것이다. 합의가 잘 되면, 논리 전개 과정인 증명을 완성하는 것으로 논쟁이 끝난다. 논쟁의 대상이 되는 A가 X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자명한 것으로, 이를 보장하기 위해서 조금 더 엄밀하게 정의해 볼 수도 있겠지만 불필요한 작업인 것 같아 여기에서는 그친다. 수학을 조금 아는 사람은 여기에서 Pi를 ‘모임 (class)’라고 표현한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해 할 수 있겠는데, ‘집합 (set)’보다 ‘모임’이 국문에서 뉘앙스가 조금 더 알맞고 실제로 비이상적 경우에는 Pi가 집합이 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것으로서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엄밀히 하자면, 집합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이 엄밀한 정의를 통해 지금까지 산발적으로 서술했던 논쟁의 여러 특성을 다시 한 번 명확히 설명할 수 있다. 논쟁의 ‘문제 판별 기능’ 3단계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명제 A 및 각자의 Pi를 정의하는 과정에서 ‘문제의 성립 여부 판별’이 된다. X와 v를 설정하는 데에서 ‘문제의 논리적 가치 판별’이 된다. 증명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문제의 복잡성 판별’이 된다.

   

이 정의에 큰 의문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은 바로 P(∪Pi)에 있다. 앞 장에 언급하였듯이 논쟁은 분명히 새로운 명제 D를 생성한다고 했는데, 이와 같은 정의를 하면 새로울 것이 전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은 이렇다. 새로운 것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데 바로 ‘발견’과 ‘융합’이다. 발견은 Pi에 완전히 새로운 명제 p를 추가하여 Pi'을 만드는, 즉, Pi'=Pi∪{p}의 과정이다. 적어도 이 글에서 정의한 논쟁은 철저히 이 기능은 하지 못하게끔 되어 있고 이는 합리적이다. 논쟁은 ‘융합’으로만 창조 기능을 하고 ‘발견’과는 상당히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논쟁이 창조하는 명제 D는 명제 집합 X의 원소이며, 이 X가 어느 누구의 Pi 와도 동치가 아니기 때문에 이 X는 새로운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따라서 논쟁의 창조적 기능은 이 정의에서도 보장 받는다.

 

어느 것이 비이상적 논쟁이고 누가 비논리적 논객인가

 

논쟁에 대해 많은 것을 자세히 정의하였으므로 우리가 평소에 겪는 논쟁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논할 필요가 있다. 비이상적인 논쟁은 논쟁의 각 과정을 제대로 따르지 않거나, 각 과정에서 명시된 명제 집합을 가지지 못하는 논쟁이다. 논쟁에서 필수적인 명제 A의 확인, 각자의 명제집합 Pi의 확인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논쟁이 성립될 수 없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논쟁은 이 단계에서 이미 좌절된다. 이것이 좌절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먼저 명제 A말끔히 정의되면 실제로는 논쟁거리가 아니게 되어 버린다는 것을 한 쪽이 이미 알고 있을 때이다. 이는 주로 정치 논쟁에 많이 일어난다. 제대로 논쟁하면 진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또는 확실히 알고 있는 쪽이 명제 A의 확실한 정의를 자꾸 방해하는 것이다. 방해하는 방법으로는 비슷한 일상어와 비슷한 논리구조를 공유하는 유사 명제 A'을 도입하는 것이 매우 유용하다. 또는 자신의 명제집합 Pi의 확인을 애매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논쟁 참가자 본인이 A를 증명할 만한 수준의 Pi를 확보하지 못했거나 이해가 낮아 자신의 Pi를 구성할 능력이 되지 못할 경우이다. 아니면 참가자 본인이 사실은 A에 대한 참 거짓에 대해 여전히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상태일 수 있다.

 

유일한 v로의 합의가 불가능한 경우도 비슷한 이유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때는 그러한 악의적 의도뿐만 아니라 실제로 참가자들이 유일한 v를 합의할 논리적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처음 듣는 명제에 대해 진릿값을 판별하는 데에는 상당한 수준의 논리 능력과 자신의 편견에서 자유롭게 탈피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다 갖춘 사람을 찾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이상적인 논쟁이 되는 경우는 어떤 사람의 Pi가 도저히 다른 사람의 Pj와 융합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일상 논쟁의 명제는 서로 간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자주 발생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a∈Pi에 대해 다른 사람이 ~a∈Pj를 가지고 있어 모순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런 유형의 문제가 특히 심각해지는 경우는 형이상학적인 명제를 자신의 명제집합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등장할 때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신’ 또는 ‘무신론’과 같은 개념을 도입해 버리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의 명제에 진릿값을 자신이 마음대로 부여할 수 있게 되며 다른 사람의 명제를 삼켜버리거나 변형 시킬 수 있게 된다. 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험’, ‘들은 이야기’ 같은 것들도 이러한 악영향을 충분히 끼치는 개념이다. 자신의 경험과 불확실한 정보 등은 그 것들이 다른 사람들의 명제 집합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진릿값을 판별하기 어려워지며, 그 특성상 다른 사람의 명제들과 잘 융합되지도 않아 그것을 마치 항진명제인양 주장하는 것을 막을 방도가 딱히 없게 된다. v(B)=1이라는 주장에 단지 ‘경험 상’, ‘들었던 바로는’ v(B)=0이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면 논쟁이 진전되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비이상적 논쟁은 이렇듯 결국 비논리적 논객에 의해 벌어진다. 신, 미신과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 경험 등의 융합을 거부하는 명제를 주장하는 사람, 논리적인 전개를 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 명확한 정의를 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사람, 처음 듣는 논리와 의견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사람, 거짓 주장 및 가짜 논쟁을 조장하는 사람 등은 모두 비논리적 논객으로서 이런 사람과 논쟁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낭비이다.

  

무엇보다 논쟁의 정의에서 보여 주었듯 논쟁이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바로 ‘합의’부분이다. 어떤 사람이 B가 항진명제임을 주장하면 B가 항진명제가 아니라는 반론은 대개 훨씬 상세하고 엄밀하고 ‘길어야’한다. 쉽게 말해 반론은 짧게, 주장은 길게 하는 사람은 이미 논리적인 논객은 아니며 논쟁의 순작용을 누릴 생각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논쟁이 만능은 아니다

 

논쟁은 여러 가지 순기능이 있지만 그 한계도 뚜렷하다. 논쟁은 융합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 수는 있지만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문제 판별 기능은 확실히 하지만 문제의 복잡성 때문에 문제 해결 기능을 실제로 할 수 있는 지는 미지수이다. 게다가 이러한 순기능은 철저히 이상적인 상태에서 진행되었을 때 가능한 이야기이며, 비이상적인 상태에서는 이런 순기능도 반드시 보장받지는 못한다.

논쟁의 정의에서 등장하는 P(∪Pi)이 논쟁은 마치 n이 커지면 커질수록 좋을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임도 강조하고 싶다. 많은 일상 명제는 융합이 불가능하거나 서로 상충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결정되는 X는 P(∪Pi)내에서도 한정된 후보만을 가진다. 이를 위해 X의 범위를 더욱 엄밀히 정의하면 좋겠으나 이를 위해서는 ‘융합 가능한 명제’, ‘상충 되는 명제’ 등을 또 정의해야 하고, 이것이 대단히 추상적이고 개념적이기 때문에 이 작업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그러나 개략적으로 문제점이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는 있다.

 

갑과 을이 있을 때, 갑의 명제집합에는 원소가 5개 있고 을의 명제집합에는 원소가 7개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이하 설명에서 모든 명제집합은 exclusive하다고 가정하자. 갑과 을의 명제를 모두 그냥 융합할 수 있다고 하면 검토할 수 있는 X는 총 2^12=4096개가 된다. 그러나 갑의 원소 중 3개만이 을과 융합가능하고, 을의 원소 중 4개만이 융합가능하다고 하면 벌써 2^7=128개로 검색 범위가 매우 줄어든다. 여기에 6개의 명제를 가진 병이라는 사람도 논쟁에 참가한다고 하자. 갑의 원소 중 사용 가능했던 3개에 대해 병과 상충되는 부분이 있어 2개만 사용가능하고, 을의 것도 2개만 사용 가능한 대신 병의 것도 2개만 사용가능하다고 하면 2^6=64개가 되어 두 명이 있을 때 보다 검토 범위가 오히려 줄게 된다. 정이라는 사람이 또 와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모두의 조건을 만족시키기가 어려워지므로 오히려 조합 가능성이 줄어 들 수 있다. 이는 융합 가능한 명제의 수가 마치 교집합적인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면 사람이 너무 많이 투입 되었을 때 갑의 의견은 하나도 융합 가능하지 못하게 되어 갑이라는 사람이 논쟁에 더 이상 참여하고 있을 이유가 없어지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는’ 경우가 생긴다. 직관적으로 생각하면 간단하다. 어느 정도 사람이 모이면, 새로운 사람이 와도 그 사람이 특별히 새로운 지식을 제시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는 힘들다. 오히려 새로 온 사람은 기존 의견에 합의하지 않기 쉬우며 그렇기 때문에 탐색 범위만 줄인다. 또한 여기에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합의에 걸리는 노력, 지식을 서로 공유하고 융합하는 시간 등은 사람이 많아지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비용이다. 그렇기에 논쟁은 적당한 수의 사람이 서로 너무 상충되지 않는 한에서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논쟁의 순기능 중 하나인 문제 판별은 사람이 적을수록 효율이 좋으며, 융합을 통한 창조 기능은 바로 앞에서 설명한 이유로 사람이 많다고 꼭 좋아진다고 보기 힘들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엮인 사회 문제를 논쟁으로 풀 수 있다는 것은 꽤 이상적인 상황을 고려해도 ‘이상적인’ 발상이다. 그렇다고 논쟁에 참여할 사람을 특정 하는 것도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 이미 ‘논쟁거리’가 될 여지가 농후하며 민주주의 정치가 ‘논쟁’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권리’의 평등 문제가 얽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단 하나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있다. 바로, 논쟁으로 무언가를 하려면 적어도 구성원들의 논리전개 수준이 어느 정도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민주국가 사람들은 어렴풋이 민주주의가 완성되어 있다고 믿고 안주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그 본 기능을 조금이나마 제대로 하려면 ‘정치적인 민주화’ 뿐만 아니라 이러한 논리 사고 능력이 필수적이다. 이것이 훌륭히 되어 있는 사회가 있는지, 또는 되어 가는 사회가 있는지, 애초에 그 것이 가능한 일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2011. 6. 22.

조만석


Posted by 호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