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내용은 그 자체로도 경악스럽고 참담하지만, 우리 국민들은 그 이면에 있는 불안도 함께 보고 있기 때문에 일이 더 커진 것이다. 박근혜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측면도 있지만, 그런 사람이 지금까지 나라의 수장으로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도 크며, 박근혜가 물러나고 나서 우리 사회가 곧바로 맑아질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크다. 앞으로는 생각나는 대로 하나씩 어떤 원론적인 문제가 우리에게 있는지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그 첫 번째는 공사구별이 없는 나라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의 가장 큰 힘이 되어준 말이 바로 ‘나라밖에 모르는 사람’, ‘나라를 위해 평생을 산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자기 가족도 없이, 영애로, 국회의원으로, 대통령으로, 오로지 나라 일을 위해 살았다는 것이 어르신들의 심금을 울린 모양이다. 말하자면, 박근혜에게는 사적인 영역이 없고 공적인 영역만 있다! 이게 어필 포인트였던 것이다. 그래서 각종 비리에 시달리는 더러운 정치인들과 다르다는 게 큰 도움이 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에 와서 보니, 없다는 가족은 이상한 최씨일가로 대체되어 있고, 사리사욕이 없다더니 옷과 음식에 사치를 일삼고 미용에 그토록 열을 올리고 있었으며, 심지어 이제는 여성의 사생활을 들먹이면서 이 신화를 스스로 붕괴시키고 말았다. 아마 이 점이 그토록 견고하다는 콘크리트층을 붕괴시킨 가장 큰 요인이 아닐까 싶다.


공사구별을 한다는 말은 유구의 좋은 말이다. 예전에 각종 상패를 수여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말이기도 했다. ‘위 사람은 공사의 구별이 명확하고 일처리가 공정하여…’ 이런 어구가 자연스럽게 늘 등장하곤 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마음속에는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공사의 구별이 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정확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려면 사적인 영역이라는 것도 명확하게 존재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는 사적인 영역이 없고, 공적인 영역만 있는 사람을 선호한 게 사실이다. 굳이 공직자까지 가지 않고 회사로 보아도, 가족 일보다는 회사 일을 우선시하고, 집에 가서 가족들과 시간 보내기 보다는 매일같이 야근하여 회사에서 살다시피 하고, 회사 일이라면 열일 마다 않고 뛰어 오는 사람이 칭송받는 그런 사회에 살아 왔고,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다. 우리 마음 속에 공사구분이란, ‘일할 때 가족이나 친한 사람을 사적으로 챙겨주거나 하지 않는다’ 딱 그 정도의 의미로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가. 사적인 영역을 모두 팽개치고 공적인 영역에서만 활동한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을까. 우리가 바라는 건 그들의 삶이 모두 공적인 것이 되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그것이 거꾸로 간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다같이 깨닫고 있다. 공사구별이 없으면 모든 것이 공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사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공사를 구별해야 한다는 말이 고래로부터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게이트의 핵심은 나라를 사유화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기상천외하게도 그냥 금전적인 면에서만 착복하는 형태로 사유화한 것이 아니라, 간단한 의사결정부터 정책방향수립, 연설문, 입을 옷, 할 말, 일정계획 등등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공적이어야 할 일들이 사적인 형태로 처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공사구별 없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운 엄청난 폐해이다.


사적인 영역이 없는 사람. 이런 것이 가능할까. 공과 사란 무엇일까.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애초에 사람들이 왜 공적인 영역의 일을 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왜 일을 하고 살까. 생계를 위함이다. 생계는 왜 위하는 가. 자신과 가족의 생존과 더 나은 삶을 위함이다. 더 나은 삶은 무엇일까. 각자에게 그것이 무엇일지는 몰라도, 이 단계에서는 사적인 이유가 등장할 것임은 확실하다. 그러니까, 사적인 영역 없이 일을 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자, 그럼 두 가지 예외가 생각난다. 첫째, 완벽한 봉사정신으로 일하는 사람. 둘째, 생계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 어르신들은 박근혜가 이 두 가지를 만족시키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간단한 둘째부터 이야기 해보자. 트럼프와 박근혜, 이명박, 이런 사람들이 이 조건을 만족한다고 보기에 지지자가 많았던 것이다. 생계가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개인적으로 비리를 저지르거나 착복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이게 포인트다. 세상에 그들보다 돈 많은 재벌들의 대부분이 여전히 자신의 생계, 즉, 더 나은 삶을 위해 여전히 악착같이 돈을 열심히 벌고 있다는 팩트는 통 크게 뒤로 해 주겠다. 지금 우리가 논의하는 사람들은 자기 혼자 글이나 쓰고 앉아있는 사람이 아니다. 매우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 주변에는 생계가 급한 사람들이 반드시 꼬이게 되어 있다. 생계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자기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생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을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자기는 괜찮으니까 내 생계는 상관없고, 너희는 생계가 급하더라도 절대 못된 짓 하지 마라. 이런 게 정상적이고, 설득력 있고, 바람직한 모습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말로 순수한 마음에서 생계를 뒷전하는 사람이 있다 쳐도 비리 없는 세상을 만들기에 썩 좋은 후보는 아닌 듯 하다.


그 다음 봉사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다. 정말 순수한 의미에서 공적인 영역의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생계는 법에 지정된 대로, 정상적인 범위에서만 해결하면 되고, 나머지 일을 하는 영역에서는 공공의 이익을 최대화시키는 방향으로만 일을 하고 싶다. 뭐 이런 의미가 되겠다. 참 좋아보인다. 그런 사람이 공직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봉사라는 말은 참 좋지만, 막상 해보려고 하면 보통 복잡한 게 아니다. 누군가가 자기에게 뭘 해준다고 해서 마냥 좋은 게 아닌 것처럼, 봉사로 하는 일이 마냥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봉사로 하는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피해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헐벗은 아프리카 애들한테 무료로 멀쩡한 옷을 보내는 너무나 선량하고 착한 일을 한다 해도, 그 지역의 의류산업을 초토화시킬 수 있다는 그런 사례들은 너무나 많다. 간단한 봉사 일도 그러한데, 이해관계자들이 첨예하게 얽힌 복잡한 정치판에서 봉사라는 것이 쉬운 일일까? 정치까지 가지 않아도, 워커홀릭도 마찬가지다. 회사를 위해 일을 한다 해도, 자기가 열심히 하는 그 일이 정말 회사를 도와줄 일이 될지 오히려 회사에 피해를 입히는 일이 될 지는 모르는 것이다.


사리사욕에 관계없이 봉사하는 사람들이 왜 그런 일을 할까. 보람을 느끼기 위해서라는 대답은 초등학생도 할 것이다. 그것도 없이 그냥 무작정 희생하는 무슨 로보트 같은 사람을 원한다고 하면, 그런 비정상자를 믿고 싶냐고 반문하고 싶다. 적어도 보람은 느껴주어야 한다. 보람을 느낀다는 것은 자기가 옳은 일을 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옳은 일. 이것이 포인트다. 그 옳은 일이 조직이나 다수에 합치하는 방향이면 잘 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봉사정신과 다수에게 옳은 일을 잘 판단하는 능력은 별개의 이야기다. 옳은 일을 잘못판단하는 사람이 봉사정신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끔찍한 자기 합리화의 제왕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럼 옳은 것을 잘 판단하는 사람이면 되지 않냐고? 100% 옳은 것은 없고, 모든 사건에 100% 옳게 할 수도 없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더더욱 그렇다. 결국 그 사람에게는 비난이 쏟아질 것인데, 보람 느끼자고 일하는 사람이 그 비난을 매번 감수한다? 슬슬 이야기가 비정상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가.


여기까지, 아주 이상적으로 공적인 영역만 있는 사람을 아무리 잘 세팅해줘도 일이 좋게 흘러가기는 힘들다는 것을 논설하였다. 그래서 보통 공적인 영역만 있다는 사람들은 결국 모든 일을 사적인 것으로 만든다. 사적인 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공적인 것을 하는 것이 위에서 말했듯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권한만 있다면 모든 것을 사적으로 만들면 일이 참 편해진다. 사적인 영역이니 옳은 일도 자기 멋대로 결정해도 되는 일이고, 생계도 자기 알아서 할 일이고, 주변 사람 관리도 자기 알아서 할 일이 된다. 그러니까 공적인 것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냥 다 사적으로 일처리를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사구별이 대안이 되는가. 당연히 대안이 된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생계도 신경써야 하고, 재물도 어느 정도 모아야 하며, 일하면서 어느 정도 보람도 느끼고 싶지만 동시에 귀찮은 일을 떠맡기는 싫고, 일도 중요하지만 가족도 중요하고 동시에 가족 때문에 일에 발목잡히기는 또 싫은 이런 혼재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구별을 해줘야 하는 것이다. 사적인 영역을 명시하기는 어렵다. 사적인 것이니까. 공적인 것을 구별해 주어야 한다. 무엇이 공적인 것인가. 그것을 단 한마디로 축약하면 ‘책임’이 있는 것이다. 아까 옳은 것이 100% 없고, 100% 잘 하기도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책임을 묻는 것이 있는 것이다. 공적인 영역에서 자기 판단대로 하는 게 사적인 것이 아니다. 해도 된다. 할 수 밖에 없다. 대신 책임을 져야 한다.


뭐가 달라졌냐고? 봉사하는 사람에게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된다. 호의로 일한다는 사람에게 책임을 어떻게 물을 수 있겠는가. 일이 주어져서 하는 사람에게 는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리고 자기가 그런 책임지는 입장이어야,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게 진정한 공사구별이다. 사적인 관계를 챙기지 않는다? 사적인 관계를 챙겨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면 챙겨도 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잘못이 발생하고 책임져야 할 일이 생길 것 같으면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런 간단한 이야기다. 위에서 이야기가 길게 된 것은 공사구별이 없는 것이 그토록 복잡한 이야기기 때문이다.


책임만 따지는 세상이 삭막하지 않냐고.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공사구별이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사적인 영역에서 얼마든지 호의로 일하고, 호의를 주고받는 것이 가능하고, 그것이 더 보람차며, 그것이 더 바람직하다. 이런 두 가지 미담을 생각해보자. 소방관이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생명을 구했다. 이 사람에게 호의로 좋은 일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 잘한 일인가? 그 사람이 높은 책임감으로 일을 했다고 말해야 잘한 일이다. 일반 시민이 같은 상황에서 생명을 구했다. 이 사람에게 책임감이 있었다고 말하는 건 어색하지 않은가? 공적인 일을 할 때는 책임으로 이야기해야 하고, 사적인 일을 할 때는 다른 온갖 감정적인 것으로 이야기 해야 한다. 그렇게 공사구별을 해야 하는 것이다.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책임 논리로만 이야기를 풀어야 한다. 호의나, 충심이나, 열정이나, 봉사나, 희생, 이런 것은 다 공사구별을 혼동시키는 나쁜 말들이다. 그것들은 사적인 영역에서 적절히 발휘될 때 아름다운 것이다. 앞으로 다시는 우리가 공적인 일을 우선하는 사람을 무턱대고 바라지 않기를 바란다. 책임감 높은 사람을 바라면 좋겠다.


무려 2천년도 더 전이다. 한비자의 식사편에 내가 이야기한 것들이 아주 잘 정리되어 있어, 이를 소개하고 줄이고자 한다. 읽어보면 참 요즘 세태에 딱 맞다. 번역은 내가 임의로 하였다.


(전략)… 군주와 신하는 계산의 관계이다. 신하가 난국에 필사의 각오로 임하며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 쏟는 것은 법이 있기 때문이다. 고로 선왕들은 상을 명확히 하여 권하고, 형벌을 엄하게 하여 두려워하게 한 것이다. 상벌이 명확하면 백성은 진력을 다할 것이고, 백성이 진력을 다하면 군대가 강해지고 군주가 존엄해질 것이다. 상벌이 흐려지면, 백성은 노력없이 상을 얻으려 하고, 죄가 있어도 요행으로 면하려 할 것이며 군대는 약해지고 군주는 초라해질 것이다. 고로 선왕들과 현명한 신하들이 진력을 다하고 지혜를 모아 말한 것이, 공사(公私)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되고, 법제를 확실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선왕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2016. 11. 24.


Posted by 호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