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를 좀 먹게 하는 가장 나쁜 사회적 분위기는 바로 천박함의 당연시였다. 천박함은 깊이가 없고 생각이 얕은 것을 의미한다. 생각이 얕으니 눈 앞의 이익에 급급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천박한 사람에게는 사실상 생존논리만 있으며, 그들은 재물을 축적하고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일에만 열을 올린다. 사치, 무식함, 문란함 이런 것이 천박함을 나타내는 지표들이라 할 수 있겠다.


대놓고 천박한 것들도 많지만, 은근히 천박한 것들도 많다. 무슨 일을 하면 그것의 명분은 무엇이고, 어떤 의도로 하는 것이며, 어떤 가능성과 가치가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 따위는 다 생략하고, 그냥 눈에 보이는 단순한 필요성만 이야기하고 구색 맞추기 급급한 게 천박한 일 처리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그거 배워서 뭐해 쓸 데도 없는데. 돈도 안 되는 거 해서 뭐해.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거 왜 하냐. 얼마짜리냐. 유명하냐. 어디다가 써먹냐. 이런 것들도 천박한 말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런 천박한 말들에 우리는 이제 지쳤다.


천박하다는 것은 사실 좋은 용어가 아닐 수도 있다. 천박하다는 말을 쓰면 꼭 그 반대편에 있는 고상한 사람들을 좋게 여기는 것 같다. 괜히 젠체하고, 생계는 뒷전이고 탐미하는 데에만 열 올리고, 급한 일이 많은 데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허송세월 하는 그런 고상한 사람들이 떠오르면 고상한 것도 좋은 게 아닌 것 같다. 이런 고상한 척하는 사람들이 싫어서 미국인들은 천박하지만 솔직해 보이는 트럼프를 선출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고상한 것이 천박한 것보다 훨씬 낫다. 왜냐면 고차원적인 윤리 개념, 수치심, 양심, 책임감 이런 것들은 천박한 사람들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왜 고통을 받고 있는가. 누가 봐도 '정말로 천박한' 최씨 일가가 나라를 장막에서 주무르고 있었기 때문이며, 천박한 그들을 실세로 세운 '똑같이 천박한' 박근혜와 김기춘 및 그 일당이 이 나라 지도층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천박한 그들에게는 양심과 책임감, 수치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이 답이 안 나오는 싸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신분이 낮아서 천박하고, 신분이 높아서 고상한 것이 아니다. 지금 국민들 머리 속에 마리 앙뚜와네트가 떠오르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실이 어떻든 간에 그녀는 문란하고 사치스러우며 무식한 천박한 귀족의 대명사였다. 그래서 죽은 것이다. 배울 만큼 배웠다고 고상해지는 것도 아니다. 지금도 생존논리에만 빠져 책임감과 양심, 수치심을 팔아먹은 이 나라의 많은 엘리트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우리나라는 원래 지나칠 정도로 고상한 나라였다. 지도층에는 늘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선비들이 있었고, 민초들은 각종 환란 때 자발적으로 의병에 들어갈 정도로 고상한 사람들의 나라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과 분단, 한국전쟁의 대 혼란기를 겪으면서 고상한 지도층이라는 것은 완전히 쓸려 나가버렸고 그 자리를 천박한 정치인과 관료, 재벌이 채웠다. 하지만 민초들은 남았다. 그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 더 고상한 목적을 위해서 3.1 만세운동을, 4.19혁명을, 6월 항쟁을 이끌어 냈다.


그리고 지금 2016년에 다시 한 번 그 고상함을 뽐내고 있다. 그 많은 인원이 그렇게 질서정연하게, 그렇게 평화적으로, 정말 그토록 고상한 방식으로 천박한 지도자들을 끌어내리려 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쳐있다. 학생 때부터는 지나친 성공논리에, 사회에 나와서는 지나친 생존논리에 지쳐있다. 그리고 그런 천박한 논리들이 결국 금수저놀이터가 된 헬조선을 만들었음을 깨닫고 있다. 차라리 지도자들이 너무 고상하다고 비판해야 할 마당에, 이 수준 높은 국민들은 천박한 지도자들에 아직도 시름하고 있다.


다시 고상함의 시대로 회귀해야 할 시점이 왔다. 풍자와 해학의 민족이라는 우리의 캐릭터는 오래 전에 잊혀졌었지만 이번을 계기로 다시 그 정체성을 찾고 있다. 고상한 민족이라는 정체성도 이번에 다시 찾아와야 한다. 천박한 박근혜와 최씨일가를 몰아내는 것은 물론이고, 나라 중심에 뿌리깊게 틀어박힌 천박한 엘리트들도 몰아내어 고상한 국민 수준에 맞는 지도자들이 이끌어 가는 나라가 되었으면 한다.


2016. 11. 20.

Posted by 호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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