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20세기 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든다. 트럼프에게 나치 복장을 입혀 풍자하는 것은 뭐 자연스럽게 되었고, 서울시청 앞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성토하는 박사모들을 보노라면 찬탁시위와 서북청년단이 활개 치던 해방정국이 떠오른다. 러시아와 중국은 말할 것도 없다. 이미 세계대전과 냉전을 끝내고, 인류는 파시즘을 이겨낸 것 같았지만 뜬금없이 21세기에 파시즘이 새로 대두하고 있다.

 왜 다시 파시즘인가. 이걸 이해하려면 먼저 여러분의 선입견을 하나씩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개인의 정치 이념을 보수와 진보로 나누는 것부터 시작하자. 보수와 진보라는 이야기를 하려면, 그보다 먼저 그 사람이 파쇼인가 아닌가부터 이야기해야 맞다. 말하자면 히틀러는 보수 파시즘의 상징이고, 스탈린은 좌파 파시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행한 일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단 히틀러도 스탈린도 아니어야 보수냐 진보냐가 의미가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민주사회의 리더십을 논할 때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을 나눌 때 그 사람이 파쇼인가 아닌가가 보수/진보 구분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더 직접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박정희를 파쇼라고 까더라도, 그 사람이 노인네를 다 쓸어버려야 한다든지 보수를 궤멸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직접적으로 가지고 있는지 어떤지가 먼저 판단되어야 한다. , 파쇼인가 아닌가는 보수냐 진보냐와 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아예 다른 분류 개념이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파시즘이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파시즘은 전체주의이자 국가주의이다. 그리고 본래 개념상 반공이 반드시 끼어있었기 때문에, 이 글의 시작에서 스탈린을 언급했을 때 갸우뚱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정치철학적으로 파시즘을 세부적으로 정의하려는 노력도 많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이러한 모든 선제적 논의들을 존중하지만, 나는 파시즘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글에서 사용하는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철저히 방법론적 개념이다.

정치 이념이라면 가치를 대변해야 한다. 보수적 가치, 진보적 가치, 사회주의적 가치, 민주주의적 가치, 뭐 이런 것들이 그 이념을 대변해야 한다. 그러나 파시즘에서 가치는 그냥 장식일 뿐이고, 나아가서 뻥이다. 민족주의, 국가주의, 전체주의 뭐 이런 걸 내세우지만 그냥 뻥이다. 나치 지도층이 그다지 순혈 아리아인 특성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대북 안보를 가지고 비슷한 일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총풍사건이, 그리고 그 이후의 여러 북풍 사건이 누구로부터 왔는가. 그저 파쇼들은 파시즘의 작동을 위해 효과적인 가치를 가져와서 장식을 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기에 국가주의, 전체주의, 민족주의 같은 것이 잘 맞을 뿐이다. 파시즘은 내가 이야기할 배제주의 방법론을 근간으로 하며, 여기에 전체주의와 같은 장식을 입히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고 앞으로의 글을 보면 좋다.

배제주의 방법론

파시즘 방법론의 핵심은 배제주의다. 여러 사람을 통합하기 보다는 배제하여 제거하는 것이다. 이 정의가 일부에게는 이상할 것이다. 파시즘은 전체주의, , 사람들을 몰개성화하여 하나로 만드는 극단적 통합주의 같은 것인데 배제주의라니? 그러나 그렇게 전개해도 되는 이유를 이제부터 말할 것이다.

 일단 사람들이 배제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점부터 말하자. 여러 다양한 사람들을 융화시키는 것은 어렵다. 미친 듯이 어렵다. 어쩌면 불가능한 목표일 수도 있다. 반면 배제하는 것은 쉽다. 충분한 권력만 주어진다면, ‘이상한 놈들을 쳐내서 격리하든 없애든지 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참으로 분명하고 어떤 경우라도 일관되게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이상한 놈들도 안고 가려면 그 이상한 놈들 특징과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방법론이 적용되어야 할뿐더러, 비용도 들고, 그만큼의 효용이 있는지도 의문시 되며, 그 과정에서 멀쩡한 사람들이 감내해야 할 것들이 많다.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 법칙과도 같은 것이다. 권력만 있다면, 배제하는 것이 포용하는 것보다 반드시 더 쉽고 빠르다. 권력을 떠나서도 마찬가지다. 그냥 배제하는 게 항상 더 쉽다. 왕따가 있을 때, 왕따를 무시하는 편이 왕따를 챙겨주는 것보다 반드시 더 쉽다. 트럼프가 난민을 안 받는다고 하여 비난하지만, 막상 우리나라가 난민을 받는다고 하면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배제주의가 강력한 것은 방법론이 명확하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 결과나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자기가 생각이 되는 쪽으로 결론이 나기가 당연히 쉽다. 생각하기 힘든 것을 탐구하여 계속해서 솔루션을 찾고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는 것은, 지금 이야기 하는 것처럼 한 가지 결론이라고 부르기도 힘들 뿐더러 참으로 지난한 과정이다. 그러니 배제로 쉽게 결론 내리는 것이 보통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배제주의가 쉬운 방법론으로 작동하기 위한 선결조건은 단 하나로, ‘권위주의라는 방법론으로 대변할 수 있다.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배제 작업을 쉽게 하는 그런 권력이 있기만 하면, 배제주의 방법론은 아주 훌륭하게 작동할 수 있다. 그렇기에 파시즘이, 배제주의가, 권위주의와 아주 잘 맞게 되는 것이다.

배제주의와 전체적 가치의 연결

 하지만 배제주의자라고 나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와 같은 극단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당위성이 떨어진다. 어쨌든 인간은 온정적이며, 배제하는 것보다 포용적인 것이 인도적으로낫다는 양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뻔하게도, 모든 것을 배제하여 자기만 남았을 때 남는 결론은 바보 같은 고립일 뿐이라는 것을 누구나 안다. 내가 배제주의라고 말을 했지만, 결코 그들은 스스로를 애초부터 배제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야기 했듯이, 그냥 편한 방법론을 택했고, 그 방법론이 배제일 뿐이지, 자기가 다 배제하여야겠다는 확고한 의지로 처음부터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이제 부조화가 일어났다. 결론은 배제인데, 배제주의를 신봉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부조화가 일어나면 그 다음 수순은 당연히 합리화다. , 이상한 쪽을 배제하였으니, 이걸 합리화하려면 자기 쪽을 통합하는 것으로 갈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전체주의와 배제주의의 만남이 생긴다. 그리고 이런 논리가 탄생한다. ‘저놈들을 배제하면 우리 사회가 더 견고해진다’. 멋진 전제가 생긴 셈이다.

이런 멋진 전제에 어울리는 것은 포괄적으로 우리 편을 만들어 주는 가치가 적절하다. 국가 정치에 대한 것이니 국가주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후보다. 우리 편은 애국시민이고, 이상한 놈들은 반국가적인 놈들이다라고 하면 간단해진다. ‘민족주의도 경우에 따라서 아주 훌륭하게 작동한다. 대다수가 동일 민족으로 있는 국가라면, 조금 더 추상적인 국가보다 피와 역사로 맺어진 민족이라는 개념이 더 강력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들이 파시즘, 그리고 배제주의와 잘 맞았던 것이다.

배제주의의 파멸의 사이클

 배제주의 방법론에 재미있는 두 가지 전제를 넣어보자하나는 ‘결국 사람들은 제각기 다르다’는 전제다.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카테고리를 들이대더라도 같은 카테고리 안에 들어오는 두 명 이상의 사람은 없는 카테고리 체계를 만들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더 쉽게 말하면, 두 사람이 있을 때 이 두 사람을 다른 카테고리로 나누는 방법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정말 그러냐고? 아주 쉽다. 일단 남녀로 반 나누고, 나이대로 나누고, 학력으로 나누고, 출신 지역으로 나누면, 벌써 수백 개의 카테고리가 생기며, 우리 모두는 이 카테고리 별로 사람들이 참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에 지지 정당, 결혼 여부, 자녀 여부, 소속 직업군, 장애 여부 같은 여전히 당연한 카테고리 몇 개만 추가해도 수 만개 카테고리가 생긴다. 여기에 관념적인 대 여섯 개 카테고리만 더 해줘도 5천만 개가 넘는 카테고리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런 공돌이 같은 설명 굳이 안 해도, 두 사람이 완벽히 일치된 의견을 갖는 건 불가능하다는 건 정상적인 성인이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다음 전제는 조금 더 복잡한데, ‘쉬운 문제만 푸는 사람은 어려운 문제를 못 푼다는 것이다. 직관적으로는 이해가 쉬운 이야기인데, 자명한 정도의 이야기는 아니다. 머리만 좋다면 쉬운 문제만 풀다가 어려운 문제도 갑자기 잘 풀 수도 있기야 한 것이다. 진리급의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지만, 대다수는 그럴 것이다는 정도로는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전제다. 쉬운 문제를 풀다가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없는 것은 어려운 문제에는 통상 복합적인 방법론이 필요하기 때문이며, 복합적인 방법론을 익히고 적용하기 위해서는 단계별로 문제를 해결해 본 경험이 중요하다. 이 이야기를 왜 했는지 알 것이다. 배제주의는 쉬운 방법론이고 포용하고 융화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배제주의로만 결론을 내어 버릇 한 사람은 나중에 결코 포용하고 융화하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이 두 가지 전제와 앞서의 논의까지 결합하면 어떤 재미있는 결론이 나올까. 이런 흐름이 생성된다.

1. 사람들이 정치적 문제에 대해 두 그룹 A B로 나뉜다.

2. 이것은 배제주의로 해결하는 것이 쉽다.

3. 배제주의로 문제를 해결한다.

4. 이상한 사람들인 B가 배제되고 새로이 통합된 멀쩡한 사람들 A 위주의 사회가 구성된다.

5. 사람들은 결국 달라서, 그 안에서 다시 새로운 이상한 사람들의 그룹 AB이 발견된다.

6. 이 새로운 구분은 이전 구분보다 더 복잡한 구분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동질적인 사람을 애써 모아놨더니, 여기에서 다시 이질적인 것을 찾아냈으니)

7. 더 어려운 문제인 만큼 배제주의로 해결하는 것이 더 쉽다.

8. 배제주의로 문제를 해결한다.

9. 이상한 사람들인 AB가 배제되고 AA 위주의 사회가 구성된다.

10. 새로 AAB라는 그룹이 발견된다.

11. 더 어려운 문제라 결국 또 배제주의를 발동한다.

12. AAB는 제거되고 AAA 위주의 사회를 구성한다.

이렇게 빠져나올 수 없는 배제주의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의 극명한 예가 박근혜인데, 아주 훌륭하게 이 과정을 따르고 있다.

1. 보수진영이 아닌 정치세력을 배제한다.

2. 보수 진영에서도 비박을 배제한다.

3. 친박에서도 진박이 아닌 사람을 배제한다.

4. 진박에서도 유신인사가 아니면 배제한다.

5. 유신인사여도 박사모 급이 아니면 배제한다.

6. 박사모 급이어도 직접적인 이득을 주지 않으면 배제한다.

7. 이득 주는 박사모 급이어도 오래 알고 지낸 사람 아니면 배제한다.

이렇게 최순실로 귀결이 되었다.

그리고 그 최순실도 이득이 아닌 손해를 끼치기 시작했으니, 당장은 공범자로서 한 배를 탄다하더라도 이미 박근혜의 마음 속에서는 배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박근혜는 이미 혼자인 상태다. 이러한 예는 숙청의 칼날을 미친 듯이 휘두르고 있는 최악의 독재자 김정은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시도 이의 좋은 예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배제주의는 쉬운 방법론이기 때문에 곧잘 채택되며, 배제주의의 합리화를 전체주의, 파시즘이 행한다. 그러나 쉬운 방법론의 함정에 빠져, 배제주의는 가속화 되며, 결국 극단적 고립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런 결론이 되겠다.

배제주의의 모순으로 인한 사이클 강화

위의 사이클에서 사실 한 가지 빠진 중요한 전제가 있다. 바로 A vs B보다 AA vs AB가 더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반대의 결론이 나와야 맞다. 어떻게든 AA AB가 공통점이 더 많으니 합의하고 포용하기도 쉬워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배제주의의 실행적 모순이 겹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일단 배제주의 방법론은 결코 AA AB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겠다. 무슨 이야기냐면, 내가 설명을 잘 하기 위해 잘 정리를 했기 때문에 AA vs AB라는 구도가 보인 것이지 현실에서는 그러한 구분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A로 통합된 사회에서 ? 살다보니 AA AB가 다르잖아?’라고 해서 문제점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A로 통합된 것으로 보였던 사회에서 뭔진 잘 모르겠지만 뭔가 다른 놈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 인식 단계에서 보통 AA vs AB의 구도가 아니라, 사실상 A vs C라는 새로운 C가 발견된 것으로 인식되기가 아주 쉽다.

그러한 전제를 떠나서도, 배제주의는 실행적 방법론이고 가치적 명분은 전체주의적인 것에 있기 때문에 파시즘은 결코 AA vs AB에 더 세분화 된 가치를 가져올 수가 없다. 생각해보라. 국가주의적 사회에서, 자명한 이상한 놈들인 아나키스트를 제거하고, 새로운 불만 그룹인 민주주의자들이 생겼을 때, 파시즘에서 아 민주주의자들도 같은 애국시민이지만 이들은 알고보면 이런 점이 다르다고 선전하는 게 얼마나 효력이 있을 것인지를. A vs B와 같이 강력한 선전을 해야 명분이 확보되지, AA vs AB로서 우리가 첫글자 A는 같지만 뒷글자가 다르니 배제해야 합니다라고 하면 명분이 심각하게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더 세부적인 문제로 들어간다 해도 배제주의적 방법론의 실행을 위해서는 예전의 거짓 이데올로기를 계속 밀고 갈 수밖에 없다. 용공조작사건과 종북논란이 대표적인 예로, 빨치산을 다 몰아내고 남로당을 궤멸시켜도 여전히 등장하는 불만 세력을 없애기 위해서는 여전히 간첩이네, 종북이네하는 것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더 원활히 풀려야 할 AA vs AB의 문제에서 파시즘은 이를 A vs C 또는 나아가서 A vs B’의 형태로 치환하며 더 무리한 해결을 수행하며, 본래의 파쇼적 정치 논리를 강화한다. 이렇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되면 돌아올 길이 더욱 멀어지며 AAA vs AAB가 등장해도 더 이상 파시즘적 해결책을 포기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예외 없는 배제주의의 숙명적인 파멸

 배제주의가 뭐가 무섭냐 하면, 배제주의 실행으로 인해 그야말로 사회에서 배제되어버린 B, AB, AAB 같은 사람들은 파멸적 상태로 돌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아무리 배제해도 이 사회에는 B, AB, AAB가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이 되며, 이들이 사회적, 경제적 파멸을 맞았기 때문에 이들이 여전히 상당부분 기여하고 있는 국가 경제도 파멸을 맞게 된다. 그렇게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물론 세상이 이렇게 단순하게만 돌아가지는 않는다. B의 배제를 통한 A의 결속이 생산성을 단기적으로 높일 수도 있으며 실제로 독일과 소련, 남한은 한 때 그러한 면도 있었다. 그리고 저렇게 극단적인 고립주의까지로 반드시 수렴되지는 않을 수도 있는 것이, 그래도 지도자가 양심이 있다면 AAAA 쯤으로 왔을 때 이미 지나치게 배제 작업이 이루어져 사회와 경제가 위험함을 자각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위에서 논했듯이 그 때는 이미 늦었으며, AAAA쯤까지 필터링했던 사회를 다시 통합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미션에 가까워 진다.

 조금 더 극명한 예외는 배제주의를 실행하되, 배제되는 대상이 극히 작은 것만 계속해서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1% B를 제외하고, 그 다음에는 0.5% AB를 제외하고 하는 식으로 저 사이클이 움직인다면 충분히 많은 사람을 계속 통합권 내에 유지하면서 파국에 이르지 않을 수도 있게 된다. 사실 파쇼들은 이런 믿음을 은연중에 갖고 있기 때문에 더 쉽게 배제주의를 택하는 것이기도 하다. 박근혜가 태극기가 촛불의 2배라고 말한 것을 보아라. 언플일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믿을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도 중동 난민이 전체 인구로 보자면 극히 일부이기 때문에 이것부터 손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배제주의의 칼날은 그렇게 작은 데서만 머물 수가 없게 된다. 사람들이 배제주의를 쉽게 택한다고는 했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결정권이 있을 때이며 자신의 일이 아니면 온정주의를 택하기가 쉽다. 왜 그렇게 되냐면, 자신의 일이 아닐 때는 방법론이 별로 중요하기 않기 때문이다. 그건 당사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자기는 좋은 결과만 생각하면 되기 때문에, 자기와 관련이 없을수록 온정주의를 갖게 된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배제주의의 칼날을 가지고 있는 권력자들만 나쁜 사람이 된다. 특히 요즘같이 언론이 발달한 이 사회에서 그것은 치명적이다. 파쇼 권력자들은 그렇기 때문에 배제 대상에 대한 온정주의를 최대한 제거하고자 하며, 결국 배제의 범위를 키워 모두 자기의 일이 되게 만든다. 위에서 이야기한 ‘A vs B’ 구도를 최대한 유지하는 것이 바로 그 최적의 방법론이다. 그렇게 배제되는 범위는 반드시 넓어지게 되어 있으며, 결국 장기적으로는 내가 이야기한 파국의 사이클로 들어가게 된다.

배제주의의 늪에 빠지지 않는 지도자를 바라며

우리가 모든 정책에서 정말 쉽고 빠른 방법론인 배제주의를 배제하고 어렵고 번거로우며 결과도 결국 장담하기 힘든 포용으로만 대응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배제주의는 마약과도 같아서 항상 기피해야 하는 것이다. 마약을 의료적으로 아주 제한적으로만 사용하듯이 배제주의도 그렇게 아주 신중하게만 사용해야 한다.

내가 배제주의라는 극단적인 용어로 말했다고 하여 나치의 인종청소나 트럼프의 반이민정책 같이 극단적인 것만 떠올려서는 안 된다. 배제주의는 아주 사소한 것에도 모두 스며들어 있다. 비정규직 문제, 여성문제, 저소득층 문제, 청년문제, 노인문제, 결혼 문제, 출산 문제, 이 모든 것에서 배제주의는 너무 쉽게 작동한다. 더 복잡한 것으로 들어가면, 필터가 고도화되기 때문에 (A vs B가 아닌 AAAB vs AAAA 를 논하기 때문에) 배제주의는 더 교묘해지며, 더 쉽게 채택되고, 우리는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늘 배제주의적 방법론인지 아닌지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이것을 피할 수 있으며, 그런 지도자가 있어야 장기적인 발전이 가능하다. 특히 통일한국이 가능 하려면, 이질적인 남북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중요한 능력이다. 이 글은 우리가 그런 지도자를 찾고, 요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쓴 것이다.

Posted by 호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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