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1시간이 넘을 거라던 판결문은 22분밖에 걸리지 않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에 배려심은 넘쳤다. 필요 없는 부분에서는 무리하지 않고, 헌재 스스로를 잘 방어하면서도 스스로를 높이며, 무엇보다도 헌법적 가치에 충실한, 그래서 국민들을 존중한 좋은 판결이 나왔다.

가장 훌륭한 부분은 헌재가 인정한 파면 사유를 규정하는 데에 있었다. 더 요약할 것도 없이 정말 잘 정리되어 있지만, 키워드를 뽑자면 이런 것들이었다. 헌법 수호 의지, 법 준수, 투명한 공개, 국회의 견제, 언론의 감시, 사실 은폐의 잘못, 그리고 이번 사태에서 보여준 박근혜의 일련의 뻥치기와 버티기 행위에 대한 적시까지. 쉽게 말하자면 박근혜가 부정부패를 하고, 무능하고, 불성실하고, 직권을 남용한 것으로는 탄핵에 이르기 힘들고, 깜깜이정부 운영과 견제 무력화, 꼼수 발동이 진정한 탄핵 사유가 된다고 본 것이다. 나는 바로 이 점이 내가 늘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아주 멋있게 축약한, 내공이 엿보이는 감동 포인트라고 생각된다. 불법을 하는 게 문제가 되었다면 노무현 대통령도 탄핵을 피해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무능과 불성실은 헌재가 스스로 상대적이고 추상적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사람을 빡치게는 하지만 그렇다고 엄격히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듯이, 권력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의 정보 접근을 제한하는 것이고, 견제 세력에 정상적으로 맞서지 않고 갖은 수를 써서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정부 운영의 투명성과 견제감시의 일반화는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메커니즘에 위치해야 하는 것이며, 민주주의 헌법의 수호자인 헌재가 이 점을 아주 정확하게 집어내었다.

선고문에서는 파면사유가 되지 못하는 사안을 크게 세 가지로 언급하였는데, 문체부 공무원 사건과 세계일보 사건, 그리고 세월호다. 여기에 헌재가 선을 그은 것에 아쉬워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이러한 사건들 하나 하나가 참으로 중대하고 박근혜의 책임임이 거의 명백한 데도, 헌재가 방어적으로 나온 것이 서운할 수는 있다. 김이수, 이진성 재판관이 다른 것은 몰라도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는 후대에 경각심을 주고자 보충의견을 넣긴 하였으나 이걸로는 부족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헌법재판소 판결이 박근혜에게 처벌을 내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님을 상기해야 한다. 방식은 결국 처벌같이 내려지지만 헌재판결의 의의는 헌법수호에 있으며, 박근혜보고 잘못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의 가치가 어떻게 하면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잘 지켜지겠는가에 있다. 박근혜 사건은 워낙 상식을 벗어난 예외적인 사항이 많기 때문에, 박근혜 케이스에 한정하여 선고를 내리는 것은 오히려 이후 일어날 수 있는 교묘한 헌법 왜곡을 막기 힘들 게 할 수 있다. 시스템적 측면에서 어떤 태도와 행위가 헌법 가치를 가장 훼손하였는가를 보고 그것을 확실히 막는 것이 중요하며, 아쉽더라도 개별 사건에 대해서는 보수적으로 판결을 내린 것은 지혜로운 것이다.

따지고 보면, 박근혜가 투명하게 정부를 운영하고, 국회 견제와 언론 감시를 보장하면서, 정상적인 절차와 법, 헌법을 존중하며 일처리를 했다면 이 모든 사건이 이딴식으로 진행될 수가 없었음이 자명하다. 그러니, 개별 사건에 대해 구체적인 못을 박지 않았다고 전혀 서운해 할 이유가 없다. 생각해보자. 또 대형사고가 터졌을 때, 앞으로의 대통령에게 성실하게 대처하라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일지, 아니면 대통령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우리가 아는 게 더 중요한 일 일지를. 성실한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분명 대통령이 무언가 성실하게 했는데, 정확히 뭔 일을 했는지는 의아하고 결과적으로 삽질만 한 것 같아 보인다면, 그 땐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그게 이명박이었다. 그런 식의 접근으로는 이명박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보공개와 견제/감시보장이 훨씬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황당했던 것은 테러방지법의 발의자였던 법사위원장 권성동 의원이 선고 직후 나와서 제왕적 대통령제 폐해 운운하며 개헌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또한 헌법재판관 중 한 명인 안창호 재판관의 보충의견도 전문을 보면 개헌 이야기가 녹아져 있다. 나는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박근혜 탄핵 심판 선고의 의의는, 이 사태가 6공화국 헌법의 결점, 즉 제왕적 대통령제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이 아니라, 6공화국 헌법 하에서도 박근혜의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87년 체제의 가치로 판단해도 박근혜는 용인해서는 안 될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니 87년 체제가 원칙적으로 잘못된 게 아니라, 87년 체제가 좀 더 제대로 굴러 가게 보완만 하면 된다고 결론을 내야 맞다. 여기에서 갑자기 제왕적 대통령제 운운하며 87년 체제의 핵심인 대통령직선제를 뒤흔드는 방식의 개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견강부회의 극치다. 개헌을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보완 측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직선제를 유지하며 4년 중임제로 간다든지, 이번 사태에서 박근혜 측이 하도 진상을 부려서 무더기로 발견된 많은 법률상 헛점들을 메운다든지, 국정 투명 운영 강화 조항을 넣는다든지 하는 정도로 족하다.

그래서 나는 이 판결이 9차 헌법, 87년 체제의 진정한 가치를 30년만에 완성시킨 명판결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이로써 일차적 완결성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전세계에 길이 남을 민주주의 역사를 썼다. 국민이 진정한 주인이 되었고, 삼권 분립도 그 의의를 이번에 드디어 확실히 찾았다. 이번 판결을 정치적, 여론 순응 판결이 아닌, 대한민국 민주주의 가치의 완성 측면에서 평가하여야 하며, 이 가치가 향후 정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호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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